④ 충북 음성 예수의 꽃동네 수도회:발가락으로 접은 가슴 시린 종이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8면

일상의 먼지를 뒤로 흩날리며 달려간 그곳엔 부활의 기쁨처럼 눈부신 신록이 일렁이고 있었다. 사랑의 기적으로 일군 작은 천국과도 같은 마을, 충북 음성군 '꽃동네'. 꽃향기 보다 더욱 진하게 가슴을 파고들던 향기는 다름 아닌 그곳 식구들의 조건 없는 사랑과 헌신, 자기 증여의 향기였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 주춧돌을 놓고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씀을 그곳 수도자들은 몸으로 살아내고 있었다.

1976년 9월 12일 오웅진(세례명요한) 신부님은 무극천 다리 밑에서 40년 동안 남의 밥을 얻어다가 동냥할 기력도 없는 걸인들을 먹여주던 최기동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6·25를 겪으며 굶주리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그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자 사제의 길을 택한 오 신부님은 최기동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 길로 주머니 돈 1천3백원을 털어 시멘트를 사서 성당 뒤편에 사랑의 집 짓기에 들어갔다. 그리고 집을 다 지은 뒤 무극천 다리 밑에 살던 걸인 18명을 맞아들였다. 꽃동네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오 신부님은,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힘조차 없는 사람'이 생긴 것은 누군가가 그들을 돌보아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한 때문이며 사랑의 결핍으로 비롯된 그 재앙을 치료하기 위해선 누군가가 그 사랑을 대신해야 한다고 하셨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소유욕과 지배욕과 사랑의 욕구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소유와 지배는 필요 조건일 뿐 인간은 결코 그것으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사랑받고 사랑을 베풀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고, 가정에서부터 자식 중심의 '내리사랑'이 실천되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다하지 못한 사랑의 의무를 대신하고, 누군가에 의해 버려진 사람들을 대신 품어 주는 사람들, 그 곳 형제회 자매회의 수도자들과 봉사자들은 음성과 경기도 가평을 비롯한 서울·청주·옥천·강화, 더 나아가 미국 뉴저지주와 캘리포니아주, 필리핀 꽃동네에서 4천명이 넘는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사랑의 도구로 살아가고 있다.

야고보 수사님은 갓 태어난 신생아에서부터 거동할 기력조차 없는 노인까지 그곳 수도자와 봉사자들이 섬기고 있는 가족들을 모두 만나게 해 주셨다. 그들의 대다수는 중증 신체 장애와 병고를 짊어지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도 없고 밥 한 술 떠먹을 수조차 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피가 엉겨붙은 상처에 달려드는 날벌레 한 마리도 쫓아 내지 못한 채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 있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작은 예수들이었다.

'천사의 집'에는 입양을 기다리고 있는 버려진 아기들과 미혼모의 아기들이 있었다.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그토록 작은 아기들의 연약함이 뭉클 가슴에 안겨 왔다.

거동이 불편한 독거 노인과 행려 노인들을 돌보아 드리는 '노인 요양원'의 침상에 누워 계신 한 할머니는 수사님이 손을 잡아드리자 천진한 미소로 연신 고맙다고 하신다.

'심신 장애 요양원'에서 받은 정신의 수혈은 잊을 수가 없다. 부자유스러운 그들의 육신에서 스며 나오는 그토록 환한 미소를 내가 어디서 본 일이 있었던가. 그들의 육신의 장애 앞에서 나는 내 정신의 장애가 부끄러웠다.

손을 쓸 수 없어 발로 모든 일을 대신 해야만 하는 한 자매는 그 발로 악수를 나누고, 움직일 수 없는 사람에게 밥을 떠 먹여주고, 그렇게 자신 보다 못한 이들을 도우며 발가락으로 종이 학을 접는다. 나는 그녀의 발을 잡고 악수를 나누었다. 따뜻했다. 그리고 그녀는 회색 색종이로 접은 종이 학 하나를 건네주며 수줍게 웃었다.

"잘 간직 할게요." 나는 그 작은 선물을 받아들며, 어쩌면 내가 사사로운 아픔으로 고통스러워 질때, 척박한 이기심으로 움츠러들 때, 그녀를 떠올리며 나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의탁 행려자를 돌보는 '부랑인 요양원', 환자들을 돌보는 '인곡 자애 병원'에도 사랑의 결핍으로 생긴 상처를 치유받고 상처에 돋아난 새 살 같은 영혼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할 줄 알게된 사람들이 있었다. 사랑의 결핍의 원인을 치유하고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사랑의 연수원'과 사회 복지 전문 인재를 양성하는 '꽃동네 현도 사회 복지 대학교', 장애아들을 위한 학교에도 사랑의 사슬은 튼튼하게 고리를 잇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소중하게 다루어지며 결코 하찮게 버려지는 사람이 아니라는 표시로 꽃동네 묘지에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아래 안치되고, 그들은 그렇게 받은 사랑을 자신의 안구나 장기를 기증해 타인에게 되돌려 주면서 이 세상을 떠난다. 가장 힘 없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그들은 유용하고 능력 있는 것만이 중요시되는 이 시대의 경제 논리에 맞서며 사랑의 기적을 소리 없이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수도자들이 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천국을 미리 보여주는 일이어야 합니다. 수도자는 사랑의 실천을 위한 하느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손님처럼 잠깐 그들의 천국을 엿보고 가는 내 뒷자락이 부끄럽기만 했다. 해 저문 귀가 길 내내, 야고보 수사님의 얘기와 함께 메아리처럼 귓가에 맴도는 말이 있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꽃동네 가족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우리는 왜 평화롭지 못하고 자주 불행을 얘기하는지, 회색 종이 학의 침묵이 내게 조용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화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