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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16강 동반 진출의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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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솔직히 한국과 일본이 왜 친해야 하는지 모를 때가 많다.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竹島)’,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할 때마다 한·일 양국이 으르렁거리면서도 여전히 두 나라는 화해와 협력을 강조한다. 북한이라는 동아시아 안보의 위협요인에 함께 대응해야 하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나라요, 생김새도 문화도 비슷하니까? 아니면 지금은 중국에 밀려났지만 일본이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라서?

한마디로 헛소리다. 일본과 친해야 하는 이유보다 친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꼽는 게 더 빠르다. “과거를 직시하겠다”는 일본 정상들의 발언을 곧이곧대로 믿는 한국인은 별로 없다. 일본의 한국침략 역사를 정당화하고 한국사를 왜곡하는 역사교과서들이 버젓이 일 정부의 검정을 통과해 아이들의 교재로 쓰이고 있다. 8·15 종전기념일엔 A급 전범이 합사(合祀)돼 있는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참배하려는 일본 정치인들이 줄을 선다. 굳이 다른 이유를 댈 것도 없다. 우리가 처음 월드컵대회에 출전한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한·일전을 앞둔 선수단에 “일본에 지거든 현해탄에 몸을 던져라”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 몸속엔 항일(抗日)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일 정부가 한국과 중국에 ‘동아시아 공동체’ 창설을 제안할 때도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사회를 지향한다)를 외칠 땐 언제고”라는 생각이 불쑥 튀어나온다. “한·일 양국민의 친밀감이 매년 높아지고 있다”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어찌 보면 “한국과 일본은 친해야 한다”는 구호에 불과하단 생각이 든다.

그런 한국과 일본이 남아공 월드컵에서 16강 결승 토너먼트 진출 티켓을 따냈다. 두 나라가 월드컵을 공동 개최한 2002년 대회 이후 처음이다. 원정경기에서, 그것도 유럽과 남미의 강호들을 상대로 어렵게 이뤄낸 두 나라의 쾌거에 ‘한국’ ‘일본’이라는 국경은 없었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를 격려하듯 선전했다. 오카다 다케시 일본 대표팀 감독은 덴마크전을 앞두고 “한국팀의 선전이 큰 자극이 됐다”고 했다. 한국이 먼저 16강 진출을 결정짓자 일본인들은 “우리도 할 수 있다”며 용기를 냈다. 도쿄에서 한국전 중계를 보고 있으면 이곳이 한국인지 일본인지 착각할 정도의 ‘편파해설’이다. 한국의 차범근 해설위원도 편파중계 논란이 일자 “오히려 너무 일본 편을 들어 걱정”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납치문제로 경제제재를 가하며 북한을 압박하고 있는 일본이지만 월드컵 대회에 출전한 북한은 적이 아닌 ‘아시아의 동지’였다.

오늘부터 결승 토너먼트가 시작된다. 16팀 중에 자랑스러운 아시아의 한국과 일본이 있다. 한국과 일본은 2010년 여름, 아름다운 추억 하나를 함께 만들었다. 두 나라가 친해야 할 이유 따윈 필요하지 않다. 한국과 일본 국민들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추억거리가 한두 개씩 늘어나면 그만이다. 언제든 손만 뻗으면 곁에 있는 존재. 경쟁을 통해 더 발전할 수 있는 관계. 그것이 진정한 한·일 우호관계 아니겠는가.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선전(善戰)을 기원한다.

박소영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