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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렌즈로 쓴 전쟁에 관한 성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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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작가주의 감독의 역할은 시인의 그것과 흡사하다. 재미는 덜할지 몰라도 그들의 영화는 성찰의 시간을 제공하는 마력이 있다. 비유컨대 상업 영화가 달콤한 막대 사탕이라면 작가주의 영화는 은은한 향의 잘 우려낸 녹차쯤 되지 않을까. 폐막을 사흘 앞둔 지난달 30일 '2002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문승욱(34)·스와 노부히로(42) 두 감독의 작품도 비록 30분짜리 단편이었지만 그 잔향이 오래 남을 것 같다.

이들은 전주영화제의 기획 프로그램인 '디지털 삼인삼색'에 각각 '서바이벌 게임'과 '히로시마에서 온 편지'를 출품했다. '디지털 삼인삼색'은 세 명의 감독들이 동일한 주제 아래 영화를 찍어 영화제 기간 중 비교 상영하는 프로젝트다.

전주영화제의 '주방장 추천 메뉴'라 할 수 있는 이 프로젝트에는 올해 두 사람 말고도 '북경 자전거'로 국내 관객에게 친숙한 왕 샤오수와이 감독이 참가했다.

촬영 때문에 내한하지 못한 왕감독의 빈 자리를 '히로시마에서 온 편지'의 주연 배우 김호정(33)이 채워줬다. 스와 감독과 그녀의 인연은 문감독의 SF 팬터지 '나비'가 맺어줬다. 지난해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김호정에게 여우주연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줬던 이 영화를 본 스와 감독이 "존재감이 대단한 배우"라며 캐스팅했던 것.

기본적인 상황과 대사만 설정된 시나리오를 갖고 배우에게 즉흥적인 재량권을 주는 촬영 방식으로 유명한 스와 감독에게 "'나비'를 통해 그런 '열린 스타일'에 혹독하게 단련됐다"는 그녀는 환상의 단짝이었다.

올해 전주영화제가 이들에게 맡긴 주제는 '전쟁 그 이후'다. 한·일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특히 식민 지배라는 특수한 상황이 얽혀 있기에 두 나라의 국민이 전쟁의 기억에서 자유롭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두 감독은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전후 세대다. 핏줄 속에 입력된 전쟁의 상흔이 전후 세대들의 망막에 과연 어떻게 찍혔을까.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스와 감독은 "나처럼 전쟁을 겪지 않은 제 3자가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죄책감과 회의에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고 털어놓는다.

그의 혼란스러움은 기실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현재 일본의 전후 세대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 여배우가 일본 감독에게서 히로시마로 와달라는 편지를 받고 그 곳에 간다는 짤막한 내용의 '히로시마에서 온 편지'에는 전쟁이 남긴 상처를 폄하하지 않되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자유로운 시각이 엿보인다.

스와 감독보다 더 젊어서일까, 문감독의 입장은 좀더 분방하다. "역사로서의 전쟁은 과거의 일이며 나의 실존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치열한 현실이 현대인들에게 더 절실한 '전쟁'의 의미 아닐까. 30대가 되면서 일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람들의 광기 같은 걸 많이 느꼈다. 막 아이 아빠가 되기 시작한 내 친구들의 고민도 '생존'이다." '서바이벌 게임'은 주가조작 혐의를 받고 서바이벌 게임장으로 도피한 한 증권회사 직원을 조명해 학연 위주의 줄서기나 마초 근성의 폭력성 등이 복잡하게 얽힌 일상을 파고든다.

이들에게 디지털 영화는 '사적인'고민을 표현하는 데 매우 적합한 옷이었다. 문감독은 "홈비디오를 떠올리면 알 수 있듯 디지털 카메라는 아주 사적이고 개인적인 매체다. 그 매체를 이용해 스와 감독은 한 개인의 기억 속 상처를 치유하는 한 편의 수필을 썼고, 나는 거친 현실감이 살아 있는 단편 소설을 발표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연기 경력이 10년이 넘는 베테랑 배우인 김호정에게 '나비'부터 벗한 디지털 카메라는 여전히 '만만치 않은'존재다. "디지털 영화는 배우의 권한과 책임이 지극히 높다. 사전에 모든 약속이 이뤄진 상황에서 진행하는 일반 영화와 달리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즉흥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문감독이 "제목을 모르고 보면 스와 감독의 작품을 보고 내가 만들었다고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하자 한바탕 웃음이 일었다.

스와 감독은 그러자 "내용은 다르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란 점에서 우리는 닮은 꼴"이라고 화답했다.

전주=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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