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 카불 여인들 이젠 화장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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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여기는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 한국전쟁 직후 우리나라도 이랬을까? 도시 전체가 처참하게 부서지고 무너지고 깨지고 망가졌다. 특히 서쪽은 80% 이상이 폐허다.

한참을 차로 달려도 보이는 것은 총알과 포탄 자국이 무수한 건물들. 학교도 정부 청사도 극장도 은행도, 특히 아름다웠을 다르라만 궁전마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괴괴하기 짝이 없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건물 밑에서 태연히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아슬아슬하다.

물론 모두 이번 전쟁 때문만은 아니다. 카불은 지난 25년간 러시아·무자헤딘·탈레반이 번갈아 점령하는 과정에서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던 곳이다. 수년간 그 흔적과 상처를 보고 살아서일까. 이곳 사람들은 전쟁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남녀노소 입만 열면 전쟁에 얽힌 이야기를 한다.

러시아 침공 때는 어느 거리가 박살났으며 무자헤딘이 장악했을 때는 어느 지도자가 죽었으며 탈레반 때는 어떻게 피난을 다녔는지 등등.

여덟살 난 슈와힌에게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니까 파일럿이 될 거라면서 덧붙이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폭탄 떨어뜨리는 전투기 말고 승객 나르는 비행기 조종사요. 전쟁은 싫어요"라고 한다.

일주일 전 샤 전 국왕이 26년 만에 카불로 돌아온 후 수도경비가 더욱 삼엄해졌다는 월드비전 현지 직원의 설명인데, 이 글을 쓰고 있는 한밤중에도 정찰 헬리콥터 소리로 귀가 멍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불은 활기차다. 카불 강변을 따라 모인 수백명의 환전상들은 돈을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돈 세기에 여념이 없다. 경기가 살아나고 있다는 조짐이란다.

거리는 노란색 중고 택시와 유엔 및 비정부기구(NGO) 차량으로 가득하다.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생기 넘치고 부르카를 입지 않은 여자들은 놀랍게도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벌써 치킨 스트리트라는 외국인 전용 쇼핑거리도 생겼다.

오늘 오후, 이 거리에서 한 미군 장교가 나를 보고 아주 반가워한다. "아, 월드비전. 우리 부모님이 한국 아이를 후원했었어요."

내가 바로 한국에서 왔다니까 더욱 반색을 하며 당장 아프가니스탄 아이를 돕고 싶다면서 결연 신청을 할 수 있는 e-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이 장교는 개발 사업의 아동후원을 말하는 거다. 긴급구호가 응급실로 실려온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면, 회복실에서 스스로 걷게 만들어 주는 것이 개발사업이다.

목숨을 살렸다고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을 그냥 내보내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긴급구호가 지속적인 개발사업으로 이어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일로 파견근무를 마치게 된다. 긴급구호 팀장으로서 처음 근무지라 어려움도 많았다.

특히 엄격한 안전수칙이 그렇다. 현장 근무 중에는 반드시 무전기를 소지하여 3시간마다 현 위치를 알려야 하고, 자체 통금시간을 엄수해야 하고 보안상 숙소 옥상에도 올라갈 수 없는 등등. 그러나 나는 긴급구호 일이 정말 좋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딱 맞아떨어지는 행복감마저 느낀다.

세상에 태어나 한사람 목숨만 구해도 귀한 일인데, 이곳에서만 해도 우리 손으로 십수만명을 구한다고 생각하면 어깨가 무겁기도 하고 가슴이 뻐근하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우리가 목숨 바쳐 일한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 중 1백만분의 1도 구제할 수 없다고. 맞는 말이다.

나도 가끔 이런 생각에 맥이 빠지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되새긴다. 바닷가, 한 어부가 아침마다 해변으로 밀려온 해파리를 바다로 던져 살려주었다.

"수많은 해파리 중 몇 마리를 살린다고 뭐가 달라지겠소?" 동네사람의 물음에 그 어부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 해파리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건진 거죠." 이것이 바로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의 마음이다. 월드비전(02-783-5161, 내선 501·502)을 평화의 도구로 삼아 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월드비전 긴급구호 팀장>

카불.

도시 전체가 폐허다.

아름다웠을

다르라만 궁전마저

뼈대만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불은 활기차다.

부르카를 입지 않은

여자들은

놀랍게도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외국인 전용

쇼핑거리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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