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권성탁씨 ‘대한민국 육군 소위인 아버지, 그의 가슴에 묻은 6·25를 말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프롤로그

1953년 제대한 아버지 권운섭(오른쪽)씨가 경북 봉화에서 복무 중인 작은아버지 권창섭씨를 찾아가 찍은 사진이다.

2009년 1월 어느 날 밤. 새벽 2시쯤이었을까. “거길 아직 안 찾아봤구나!” 권성탁(50)씨는 이불을 젖히며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가 50년이 넘도록 숨겨왔던 6·25 참전 사실을 입증할 자료를 찾아다닌 지 석 달째. 경북 예천 본가에도 몇 차례나 내려갔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오늘밤에는 아버지의 비밀을 밝힐 수 있을까. 권씨는 서둘러 책장으로 달려갔다. 맨 아래 여닫이 문을 열고 손으로 깊숙이 더듬었다. ‘졸업’이라고 금박글씨가 적힌 종이 상자 하나가 잡혀 나왔다. 상자를 열자 찢어진 방위학교 졸업증서가 보였다. 소위 임관 사령증, 소위 신분증, 상이(군인)증, 6·25 종군기장 가 수여증(지금의 훈장)이 잇따라 쏟아졌다. 증서마다 ‘권운섭’, 아버지의 이름이 또렷했다. “정말이었구나…. 정말 아버지가 참전용사셨구나….” 사진 속의 아버지는 권씨의 아들보다도 젊어 보였다. 군복을 입은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젊은 아버지를 권씨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아버지는 대한민국 소위였다

“입 돌아간 집 아들 권성탁이~.”

아버지의 졸업장 상자에서 나온 임관사령장, 지금의 훈장에 해당하는 종군기장가수여증, 지난해 2월 받은 국가유공자증서(왼쪽부터).

그날도 친구들은 권씨를 놀렸다. 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입 돌아간 집 아이’. 동네 사람들은 권씨를 그렇게 불렀다. 친구들은 입이 비뚤어지고 말이 어눌한 아버지를 ‘벙어리’라고 놀렸다. 권씨가 어쩌다 말을 더듬기라도 하면 “벙~어리 아들은 말~더듬이”라며 노래까지 불러댔다. 졸업식이 싫었다. 아버지가 학교에 오기 때문이다. 먼 길로 둘러 다녔다. 아버지랑 마주치기 싫어서. 아버지의 어눌한 말을 가족들만은 알아들었지만, 권씨는 짐짓 모르는 체하곤 했다.

아버지는 묵묵히 동네 꼬마들의 놀림과 아들의 심술을 참아냈다. 왜 장애가 생기게 됐는지 아들을 앉혀놓고 설명 한번 해주질 않았다. 권씨는 ‘그저 우리 아버지는 태어날 때부터 그랬으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상이용사였다니. 나라를 위해 싸우다 다쳤다는 그 말 한마디를 평생 자식한테조차 못 했었다니…. 왜, 왜…. 권씨의 목이 메어왔다. 석 달 전 그날이 떠올랐다.

나 죽으면 국립묘지 묻으면 어떻겠노

“성탁이 애비가 한(恨)이 많아서 이런 우환이 생기는 기라. 동생을 그리 보내고 평생 혼자 속앓이를 하다 죽었으니….”

권씨의 형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에 수런거리던 집안 어른들이 조심조심 나누던 얘기를 그만 권씨가 듣고 말았다. 어머니에게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며 따지듯 물었다.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니는 몰랐제…. 너거 아부지도 전쟁터에 나갔던 기라. 그런데 같이 군대 간 동생은 죽어버리고 아부지 혼자 살아 돌아왔는기라. 그래서 너거 아버지가 평생 동생 보낸 죄인이라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살았다 아이가….”

권씨는 불현듯 임종 전 아버지가 지나가듯 한 말이 기억났다. “성탁아, 내 죽으면 국립묘지에 묻으면 어떻겠노. 국방부에 가서 명예회복도 하고.” 권씨는 암으로 쇠약해진 아버지가 헛말씀을 하시나 보다, 대수롭잖게 생각했었다. “선산을 두고 어딜 가시냐”고 핀잔까지 줬었다. “그렇제…” 하고 희미하게 웃으며 스스로를 납득시키듯 고개를 끄덕이던 아버지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다음 날 권씨는 안동보훈처에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의 참전 사실을 증언해줄 증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교희(77)씨를 찾아갔다. 아버지의 군대 후배라며 매년 서울에서 예천까지 인사를 오던 분이었다. “최전방이었어. 강원도 화천. 형님은 대대참모셨고. 1년 반이 넘도록 밤낮없이 전투를 하다가 안면마비가 되셨지.”

권씨는 멍했다. 농사밖에 모르는 아버지, 남들이 함부로 대해도 참아 넘기는 아버지가 장교였다니. “아버지는 저한테 한번도 6·25 얘기를 안 하셨어요. 이해가 가지 않아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권씨를 김교희씨가 젖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동생 죽인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형님은 동생이 전사한 후에는 나한테조차 군대 얘기를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50년이 넘도록 비밀을 품고 산 그 마음이 오죽했겠나.”

아버지의 우울증

권씨는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매년 돌아오는 작은 아버지 제삿날, 아버지는 항상 화가 난 표정이었다. 할머니는 “창섭이는 안 죽었다”며 소리내어 울었다. 아버지는 “내가 죽였다는데 언제까지 그러실 거냐”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는 “내가 안 보고 말지” 하며 집을 나가 제사가 끝날 무렵에야 들어왔다. 그땐 그저 아버지의 괜한 역정인 줄로만 알았다. 아버지는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달고 살았다. 우울증이 심했다. 항상 혼잣말을 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건 운명인데 내가 괜히 손을 댔어. 가만히 두었으면 살았을 놈인데…. ” 권씨가 “무슨 말씀이시냐”고 물으면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곤 했다. 그냥 우울증 때문에 하는 말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창섭아, 니는 봉화로 가라

아버지는 제 손으로 동생을 사지(死地)에 보냈다. 아버지는 105사단 대대참모였다. 병력을 각 부대에 보내는 것도 아버지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38선 북쪽에 위치한 강원도 화천 금화지구, 최전방에 있었다. 공격하기 좋은 곳은 공격당하기도 좋은 법이다. 매일 사람이 죽어 나갔다. 아버지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1년3개월을 싸웠다. 1952년 2월 아버지는 안면마비에 걸려 부산으로 후송됐다.

작은아버지가 영장을 받은 건 그 무렵이었다. 할머니가, 아버지가 입원한 부산 제5육군병원에 울면서 찾아왔다. 둘째 아들만은 군대에 빼앗기지 않겠다면서 전쟁통에 용케 처자를 수소문해서 결혼까지 시킨 할머니였다. “운섭아. 니가 병신이 돼 가지고 드러누웠는데 창섭이라도 살려야지 않겠나. 창섭이 처가 엊그제 아들꺼정 낳았다.”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선 국회의원·장관의 아들들이 병상을 차지하고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전방에 가면 동생은 죽는다.’ 아버지는 밤새 뒤척였다. 작은 아버지가 제주에서 훈련을 마치고 부산에 오던 날, 아버지는 부두에 나갔다. “형!” 하고 외치는 작은아버지의 손을 낚아챘다. “창섭아, 니는 경북 봉화로 간다.” 그렇게 강원도 원주로 가던 작은아버지는 고향 근처 봉화로 빠졌다.

동생이…죽었다

위는 권성탁씨가 아버지를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한 후 49일 만에 다시 찾아가 찍은 사진. 아래는 작은아버지 묘에서 누나와 찍은 것이다.

1954년 초, 작은아버지가 순직했다는 통지서가 고향 집으로 날아왔다. 할머니가 쓰러졌다. “창섭아, 창섭아. 니 형은 전쟁통에도 살아나왔는데 어찌 너는 전쟁이 끝났는데 죽었다는 거냐.” 정신이 든 할머니는 아버지를 붙잡고 오열했다. 최전방인 강원도 원주에 배치받은 동기들은 모두 살고, 후방으로 빠진 작은아버지만 죽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후방은 아수라장이었다. 매일같이 공비 토벌작전이 벌어졌다. 밤새 총소리가 온 마을을 뒤흔들었다. 아침이면 공비들의 시체가 산 아래 쌓였다. “전방이 후방 되고 후방이 전방 됐다”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숙덕였다. 작은아버지도 토벌작전 중에 죽었다. 목숨만이라도 건지게 하려고 눈 딱 감고 빼돌렸던 동생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권씨는 문득 1981년 해군 입대를 앞두고 예천 본가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가 떠올랐다. “해병대로 가게 될 수도 있다는데 어떻게 손써서 막을 방법은 없을까요?” 권씨의 말에 아버지가 돌아앉았다. “나는 군대에는 손 안 쓴다. 괜한 짓 했다가 죽는 수가 생긴다.” 아버지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눴던 군대 얘기였다.

죽기 전에 꼭 내 손으로 해야 한다

작은아버지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2006년 아버지가 나서서 한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선산에 묻힌 작은아버지를 현충원으로 이장하겠다고 선언했다. “내가 죽기 전에 너거 작은아부지 명예회복을 시켜줘야겠다. 전쟁 나가서 죽었는데 나라에서 인정은 받아야 안 되겠나.”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몸 생각 하셔야죠. 그 일은 저희가 맡아서 하겠습니다.” 자식들이 만류했지만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내 손으로 해야 한다. 꼭 그래야 하는 까닭이 있다. 너희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아무도 아버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모든 것을 아버지가 혼자서 했다. 작은아버지의 전사통지서를 찾아 보훈처에 보내는 것까지 아버지가 다 했다. 그해 5월, 작은아버지는 대전 국립현충원 참전용사 사병 묘역으로 옮기셨다. 아버지가 직접 묻었다. 이후 아버지의 병세는 급속히 악화됐다. 40대 때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을 정도로 심했던 우울증도 다시 찾아왔다. 나중에는 평생 먹어온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도 넘기질 못했다. 의사가 말했다. “폐암입니다.” 2007년 10월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에필로그

22일 2년간의 추적 끝에 아버지의 6·25 참전 사실을 증명해 낸 권성탁씨가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사무실에서 유품을 정리하고 있다.

그날 밤 권씨는 책장 안쪽에서 아버지의 회고록도 발견했다. 자신에게 보내달라 부탁했던 2007년 다이어리에 빼곡히 적힌 아버지의 필체. ‘권씨에 대해 알아보자’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회고록은 마침표도, 띄어쓰기도 없이 서른 장이 앞뒤로 빽빽했다. 작은아버지의 전사에 대해 적은 글도 있었다. ‘말조차 하지 못하는 더 어려운 일’. 그래서 아버지는 55년 동안 침묵을 지킨 채 비밀을 안고 저세상으로 가셨을까. 권씨는 아버지가 회고록에조차 차마 적지 못한 말을 대신 써 드리고 싶었다. ‘내 동생아, 살리려고 손을 써 보낸 곳이 네 사지(死地)가 될 줄이야.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지난 4월 5일 권성탁씨는 아버지를 대전 국립현충원에 모셨다. 참전용사 장교 3묘역. 바로 길 건너는 작은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사병 3묘역이다. 형제는 이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57년 동안 못한 얘기들, 원 없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그 한마디, 이제는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정선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