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A'와 '부실A'의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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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제신용평가회사가 내놓은 보고서 한장의 위력은 대단하다. 무디스가 우리나라 국가신용을 'A3'로 두 단계 상향 조정한다는 발표는 한국인의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펴게 했다. 그게 무슨 대단한 낭보라고 떠들썩한가 라는 핀잔도 없지 않다. 그러나 1997, 98년 외환위기 때 해외에서 근무했던 나는 우리나라 신용등급이 무려 10단계나 강등되었던 충격을 잊지 못한다.

기업인 얼굴 보면 國力 알아

당시 일본 나리타공항의 서울행 탑승구는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기업 도산과 조직축소로 도쿄(東京)에서 철수하는 상사원들과 금융기관 관계자들, 학업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유학생들의 모습은 전장에서 퇴각하는 패잔병과 다를 바 없었다. 국력이 쇠잔해지면 국민의 몰골이 이렇게 처량해지는구나, 경제가 삐끗하면 도처에서 천대를 받는구나 하는 서러움에 모두들 얼굴을 묻었다. 그런 참담한 표정들은 뉴욕이나 파리·프랑크푸르트·모스크바공항의 서울행 탑승구 어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나라의 경제사정이 어려워지면 국제신용평가 조사단은 해당국 고위층을 찾아다니게 된다. 국가신용등급이 추락할수록 그들은 높은 사람들을 맞대면하며 국가경영 방향과 원칙, 통치력을 체크한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면담 대상자는 각부처와 기업 실무자들로 낮춰졌다. '신용등급 A'로 가는 과정이었다.

한국은 아주 특이하면서도 상징적인 경험을 하고 있다. 97년 말 두달 동안에 국가신용등급이 정크본드 이하의 투기등급으로 추락함으로써 최단기간에 최다단계(S&P에 의해 10단계, 무디스에 의해 6단계)의 신용하락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후 원상회복이 진행되는 중 이번엔 'A3'로 두단계를 훌쩍 뛰어넘는 이례적인 일도 벌어졌다. 3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설만큼 압축성장한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잠깐 사이에 이 나라가 아주 가는 게 아닌가 하고 실의낙담하고 이민을 서둘렀던 사람들이 또 어느날부턴가 이제 좋아졌노라는 시장의 반응에 따라 증시에 몰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기복이 심하고 우리들 의식 또한 그 테두리 안에서 맴돌고 있다. 각계의 불안정성이 '장기 신용'을 유지하는 장애물이다. '부실 A'등급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기업구조조정 과정을 밟아 왔다. 미국·유럽 전문가들이 한국경제의 기초체력이 달라졌다고 평가하는 이면에는 구조조정 노력에 대한 높은 점수가 고려돼 있다. 한국을 부추겨 지지부진한 정책에 매달리고 있는 일본 정치인들을 비판하려는 의도를 엿보이면서 한국의 경제적 성과와 대외개방도, 투명한 사회 시스템 구축 일정 등에 괜찮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에 크게 기여한 우리나라 국민과 기업의 역동성을 어느 방향으로 유도해서 국력으로 응축시켜 가는가 하는 것은 정치인들의 몫이며 또 그들의 책임이다. 일본은 한국의 구조조정 추진력과 국제규범으로의 접근 노력을 경쟁력의 모델로 삼고자 한다. 대만은 한국처럼 금융부실을 털어버리는 과감한 개혁을 요구한다.

과욕 부리면 추락할 수도

한국은 해외에서 평가받고 있는 만큼 국내에서 좋은 소리를 듣고 있지 못하다. 떠나가는 정권의 운명이다. 그것을 탓할 필요는 없다.많은 시행착오에 대해 묵묵히 사과하고 개선하며 불법 노조운동에 원칙으로 맞서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신용A'등급 이상의 사회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또 다른 욕심 때문에, 또 다른 오판 때문에 국민과 기업의 역동성이 분산된다면 최단기간에 신용이 추락하는 아픔을 다시 맛보게 될지 모른다. 대선이 끝난 후 우리 사회가 '부실A'등급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지 않도록 기도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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