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0대5, 중국에 1대4 '동네북' 된 日바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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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울고 싶다. 다른 일본기사들도 속으로는 울고 있을 것이다."

오키나와에서 열린 아시아 4개국 단체전에서 한국에 5대0으로 지고 중국에도 4대1로 져 꼴찌가 된 직후 일본 팀 주장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9단은 이렇게 괴로움을 토로했다.

이에 반해 한국은 일본과 대만을 연속 5대0으로 꺾고 우승했다. 10전10승을 거둔 막강 한국과 10전9패를 한 일본의 참담한 전적이 크게 대비되는 순간이었다. 한국이 강한 탓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은 져도 너무 지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슬슬 밀리던 일본바둑은 최근에 와선 거의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지고 있다. 찬란한 역사를 지닌 일본바둑은 과연 이대로 침몰하고 말 것인가.

지난 22일 오키나와에서 열린 '바둑아시아컵 인 오키나와'는 한국·중국·일본·대만 4개국이 5명씩의 선수를 출전시켜 벌인 국가대항전이었다. 첫날은 한국 대 일본, 중국 대 대만의 대결.

한국은 조훈현9단이 오타케 히데오9단에게 불계승했고 이창호9단은 자신의 천적인 요다 노리모토9단에게 1집반을 이겼다. 이어서 박영훈3단은 혼다 구니히사9단에게 1집반승, 유창혁9단은 아와지 슈조9단에게 8집반승, 이세돌3단도 하네 나오키8단에게 4집반을 이겨 도합 5대0.

한국은 이튿날의 결승전에서도 린하이펑9단·왕밍완9단 등 일본파 기사들이 주축이 된 대만팀을 역시 5대0으로 일축해 단 한판도 내주지 않으며 2천만엔(2억원)의 우승상금을 챙겼다.

반면 일본은 대만에 진 중국팀에도 4대1의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며 최하위로 처졌다.

이 대회 직전에 열린 도요타 덴소배 세계기왕전에서도 일본은 주최국의 이점을 안고 12명이나 출전했지만 남미의 아마추어나 홍콩 기사에게도 패하는 수모 끝에 4명만이 2회전에 올랐다. 게다가 그 4명 중 3명은 대만계고 진짜 일본기사는 야마시타 게이고7단 한명뿐이었다.

조훈현9단은 "일본이 이상해요. 계속 지면서도 대표팀을 2진으로 내보내거든요"라고 한다. 이번 오키나와의 단체전에서도 요다9단과 신예강자 하네8단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한물 간 기사들이다.

아닌게 아니라 일본은 단체전에서 최강 선수단을 구성하기를 꺼린다.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은 일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한국 프로들은 일본 아마추어조차 꺾기 힘들었다. 한국은 최정예로 팀을 짰고 일본은 아마-프로 혼성팀을 구성해 대결했지만 한국이 일방적으로 졌다. 그때의 영광만 되새기며 일본은 형편없이 지고 있는 지금도 정신을 못차리고 그 시절의 느슨한 자세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키나와에 4개국 단체전을 유치한 일본 CSK그룹의 사장은 일본 바둑의 부활을 촉구하며 이런 말을 했다.

"프랑스는 포도주로 일등이었지만 그 수입국들이 기술을 개발해 곧 2등국으로 처지고 말았다. 그러나 프랑스는 10년간의 피나는 노력 끝에 다시 1위로 복귀했다. 일본도 노력한다면 다시 바둑의 일등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기사 세상 일은 모른다. 20년 전만 해도 지금과 같은 무적 한국의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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