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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든 네 남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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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서울시청 앞 프라자 호텔 지하 1층 귀퉁이엔 작지만 특별한 꽃집이 있다. 장미·백합·튤립 등 눈과 코를 아찔하게 하는 온갖 꽃들로 일년 내내 봄을 만들어 가는 이곳. 꽃 무더기 사이에서 가위를 들고 바삐 움직이는 네명의 '아저씨'들이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 네 남자와 꽃 바구니

프라자 호텔 꽃집을 지키고 있는 '플로리스트(florist·꽃 디자이너)4인방'은 박찬식(41)실장, 최덕순(30)·이동섭(30)·강세일(23)씨.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총각 4인방'이었지만 동섭씨가 지난해 5월 꽃보다 아름다운 반려자를 선택한 뒤 '총각 3인방과 아저씨'가 됐다.

20년째 꽃과 함께 살고 있는 맏형 박찬식 실장은 국내에 몇 안되는 정상급 플로리스트. 1982년 군에서 제대한 뒤 우연히 접하게 된 동양 꽃꽂이의 선(線)에 사로잡혀 가위를 들었다.

"그때만 해도 남자가 꽃을 다룬다는 게 모험이고,별난 일이었죠. 이젠 남자 후배 셋을 데리고 일하고 있으니 세월 참 많이 변했습니다."

박실장의 '모험'은 대성공이었다. 국내에서 가장 큰 꽃 대회 중 하나인 '코리아컵'에서 1995, 96년 우승하고 97년엔 준우승을 했다. 한국 대표 자격으로 각종 국제 꽃 경연대회에도 여러번 참가했다. 지난 2월엔 일본 히로시마 '한·일 꽃 축제 쇼'에 유일한 한국 대표로 초대됐다. 장미·수선화·히야신스 등으로 꾸민 봄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선보여 관객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최덕순씨는 꽃집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다가 꽃과 운명적인 인연을 맺게 됐다.

"4년 동안 해왔던 인테리어 디자이너 경력을 뒤로 하고 97년 꽃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말 그대로 배꼽잡고 웃더군요. 하지만 지금도 제 결정을 후회하지 않아요."

장미꽃을 1백송이,2백송이,3백송이 차례로 보내 여자 친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최씨는 "가끔 '커피 한잔 하자'는 여자 손님도 있다"고 살짝 귀띔했다.

"남자들이 '꽃집 아가씨'에 대한 환상이 있듯 여자 손님들도 '꽃을 든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있나 봐요. 하지만 고객과 사적으로 만난 적은 정말 한번도 없어요(웃음)."

봄꽃처럼 수줍게 웃는 모습이 서로 닮은 이동섭씨와 막내 강세일씨는 대학 전공으로 원예를 공부했었다.

"남들이 여려보인다고 하는데, 취미는 모터 사이클이에요. 스트레스가 쌓이면 지방 도로로 나가 시속 2백㎞로 질주하는 스피드 광입니다." 강씨의 말이다.

# 호텔 꽃집의 하루

"일이 너무 고돼 여자가 버텨내기 힘들어요."

'꽃집의 아가씨'가 없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이들의 대답이다.

네 남자의 하루는 출근 전 새벽 시장에 들러 그날 사야 할 꽃들을 살피는 것으로 시작된다. 꽃의 신선도와 모양 등을 꼼꼼히 살펴 꽃을 주문한다. 오전에는 레스토랑·객실·연회장 등 꽃이 놓여야 할 호텔 곳곳을 점검한다. 하루 평균 객실 10여개와 15~20개의 연회 꽃 장식을 한다. 오후 1시에서 2시 사이는 이들이 가장 바쁜 시간. 수천송이나 되는 꽃들을 일일이 다듬는다.

결혼식이 많은 주말이면 꽃길에 사용되는 20㎏ 가량의 꽃 기둥을 수십개씩 만들어 날라야 한다. 이동섭씨는 "웨딩 꽃을 만들기가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지만 다른 사람의 행복한 날에 한 몫을 담당한다는 게 정말 뿌듯하다"고 말한다.

# 꽃집 아저씨 VS 플로리스트

꽃을 디자인하는 사람도 예술가(플라워 아티스트)로 인정받는 외국에 비해 아직 우리나라에선 '플로리스트'에 대한 인식이 미흡한 것이 현실.

박실장은 "꽃은 장식품을 넘어 공간 분위기를 좌우하고, 마음 속 깊은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는 하나의 예술품"이라고 강조했다. 힘들 때도 많을 테지만 항상 예쁜 꽃에 둘러싸여 생활하기 때문인지 네 사람은 내내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꽃처럼 순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살이도 훨씬 향기로워질테지요."

글=김현경,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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