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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반사 ! ”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8면

곽노현씨를 비롯한 몇몇 진보 성향 교육감 당선자 자녀가 외고·과학고 등 특목고 출신이거나 재학 중이라는 논란을 접하면서 초등생들 말씨름 장면이 떠올랐다. 진보라면 당연히 특목고를 ‘귀족학교’라고 비판해왔을 것이고, 교육감에 취임해 외고·과학고를 손보지 않겠느냐는 예상이 있던 터다. 그런 판에 당선자 자녀들은 특목고에 진학했다니 즉각 “반사!” 소리가 나오지 않겠는가. 그러나 같은 ‘반사’ 외침이라도 어감상으로 확연히 다른 세 종류가 느껴진다. 하나는 “너도 별 수 없구나. 위선자구나”라는 힐난이고, 두 번째는 “복받았네. 아이가 공부 잘해서 좋겠네”라는 부러움이고, 마지막은 “그렇다면 특목고가 폐지까지 되지는 않겠네”라는 대단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이다. 사람에 따라 이 중 한두 개, 혹은 셋 다를 느꼈을 것이다. 나의 경우 두 번째의 “부럽네”가 솔직한 심정이었다. 특목고에 재학 중이거나 진학을 노리는 학부모라면 세 번째 추론에 기댈 법도 하다.

그래서 곽노현 당선자 측이 “아들이 일반고는 분위기가 엉망일 테니 외고에 가겠다고 해서 보냈다” “(입학 후) 실상을 보니 국·영·수 입시학원처럼 운영하는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가르치는 데라면 안 보냈을 것”이라고 해명하는 것을 보고 차라리 아무 말도 말지 뭐 저렇게 데데한 변명을 하나 싶었다. 외고가 어떻게 가르치는지도 모르면서 진학시켰다고? 특목고 보내려면 아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애면글면 온 가족이 부산을 떨어도 될까말까인 현실을 익히 아는 보통 학부모들로서는 참 믿기 어려운 얘기다. 일반고가 ‘분위기가 엉망’인 것은 나도 두 아이 다 일반고 졸업생이라 잘 안다. 그러나 일반고·외고 여부는 선택사양이 아니다. 외고를 못 가니 일반고에 가는 것이다. 그래서 곽 당선자가 부러운 것이다. 그는 차라리 “비록 미성년자이지만 인생의 중요한 결정에서 아이의 의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라든가 “외고 안 보냈으면 아마 부부싸움이 대판 났을 것”이라는 식으로 해명하는 게 더 나았다.

질투가 지나쳤다면 곽 당선자에게 미안하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반사!” 풍조의 위험성이다. 초등생 말싸움에나 활용되고 말아야 할 것이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는 게 안타까워서다. 다행히 곽노현씨는 잠시 논란이 벌어지는 선에서 반격을 비껴가는 듯하다. 교육·병역·친일·학력·논문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들에서 그동안 많은 이들이 “반사!”의 덫에 걸려, 혹은 체면을 구기고, 혹은 피 흘리며 쓰러졌다. 유난히 목청을 높였던 진보 인사들도 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대열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의 주적은 미국”이라던 교수는 아들이 주한미군 카투사로 복무한 것으로 드러났고, 남의 아들 병역기피 의혹을 모질게 물고 늘어지던 언론인의 두 아들은 떡 하니 병역을 면제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부친이 일제 헌병이었대서 당 의장직을 내놓는가 하면,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동학혁명군 유족을 찾아가 증조부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고 했다. 자기성찰이 빠진 행동은 언젠가 “반사!”로 갚음 받는다. 그렇더라도 너도나도 “반사!”만 외치다 보면 남 탓하기·흠잡기가 우리 사회의 본업처럼 되고, 문제의 본질은 실종된다. 자기만 걸려들지 않길 바라며 남을 탓하는 총체적 위선, 이중성의 사회로 전락할까봐 나는 두렵다. 곽노현 당선자의 경우도 본질은 아들의 외고 재학 여부가 아니라 ‘엉망’인 일반고 분위기를 바로잡는 일 아니었던가.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