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3> 제100화 '환란주범'은 누구인가 ⑦ 10월28일 심야 대책회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강경식 부총리, 이경식 한은총재, 필자가 심야 대책회의 일정을 미리 잡아 놓았던 1997년 10월 28일은 공교롭게도 달러당 원화 환율이 하루 상한폭(2.25%)까지 올라 외환시장이 폐장된 날이었다. 환율은 9백57원.

그날 밤 다른 곳에 들렀다가 10시쯤 회의장에 도착해보니 참석자들은 이미 9시30분부터 모여 재경원이 만든 'Talking Point'란 한장짜리 자료를 놓고 토의를 벌이고 있었다. 자료엔 외화유입 확대 및 금리인하 유도 방안과 증시대책, 성업공사의 부실채권정리기금 확대문제, 구조조정 활성화방안 등이 담겨있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끝난 회의에선 채권시장을 과감히 푸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시장상황이 연중 좋지 않았으므로 웬만한 대책은 이미 다 쓴 터라, 남은 것은 더 과감한 금융부문 대외개방이었고 그 중에서도 채권시장개방이기 때문이었다.

또 증시불안을 풀 열쇠는 금리니, 장기회사채 시장을 열면 외화공급도 늘어나고 금리도 내려가 증시안정에도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이었다. 그밖에 현금차관 도입 확대, 중소기업 연지급 수입기간 자유화, 연기금 투자확대 유도 등 당시 정부가 할 수 있는 대책들은 모두 쓰기로 참석자들은 합의했다.

종합 대책을 만들라는 金대통령의 지시로 특별히 열린 회의였던 만큼 분위기는 사뭇 진지했고, 경제 상황과 대책에 대한 재경원과 한은·청와대 경제비서실의 인식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날 합의한 내용이 다음날 金대통령 재가를 받아 발표한 '10·29 금융시장 안정대책'이다.

이와 관련해 하나 짚고 가야 할 것이 있다.

감사원과 검찰은 뒷날 한국은행이 10월 27일부터 외환위기를 경고하고 IMF 협조융자 검토를 요구했는데도 姜부총리와 내가 묵살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 그 근거는 28일 심야 회의에 한은이 참고자료로 내놓았던 '최근의 외환시장과 대응방안'이란 보고서였다. 35쪽짜리 그 보고서를 나는 그때 읽어보지 못했다. 긴박하게 현안을 논의하고 있는데, 한은 총재나 배석자가 "반드시 읽어보아야한다"고 들이밀지 않고 서류더미 속에 끼워넣은 '참고자료'를 어찌 눈여겨 보겠는가.

뒷날 내가 그 보고서에 대해 이경식 총재에게 물었을 때 李총재조차 "그날 그런 게 있었던가요"하고 되물었을 정도였다. 그 참고자료를 한은이 그날 낮 재경원 원봉희 금융정책국장과 청와대 경제비서실 김용덕 국장 방으로 인편에 보냈다는 것도 당시엔 보고받지 못하고 나중에야 알았다. 결국 그 자료를 직접 구해 읽어본 것은 다음해 2월께였다. 어쨌든 검찰이 문제 삼은 내용은 보고서 말미의 '외환 사정이 2단계로 악화돼 외환위기 발생시 IMF·BIS 등 국제금융기구 및 외국 중앙은행으로부터 긴급자금을 조달한다'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보고서는 'IMF로부터의 자금조달은 스탠드바이 협약을 체결해야 하므로,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지 않은 외국 중앙은행으로부터 우선 자금을 조달한다'는 단서를 붙이고 있다. IMF란 용어가 등장하긴 했지만, IMF 자금지원은 조건이 붙기 때문에 오히려 될 수 있으면 받지 말자는 의미였다. 분명히 말하건대, 28일 심야회의를 열던 그 즈음까지만 해도 회의 참석자는 물론이고 연구기관이든 학자든 그 누구도 IMF행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李총재는 姜부총리와 필자의 경제기획원 선배이자 이미 부총리를 지냈기에 얼마든지 우리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입장이었지만 그날 IMF행과 관련된 어떤 얘기도 하지 않았다. 결국 당시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긴 했어도, 곧바로 IMF에 갈 정도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문제가 된 한은 보고서조차도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확대에도 불구하고 투자자금이 재유입되지 않고 금융시장 불안이 지속될 경우, 주가가 다시 폭락하고 외국인 투자자금의 대규모 유출과 환율급등이 상승작용을 하면서 외환위기 사태로 급진전될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는 내용을 '최악의 경우'로 가정해놓고 있었다.

정말로 그때까지는 불과 10여일 뒤 그 '최악의 경우'가 현실로 다가올 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정리=이상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