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제2부 薔薇戰爭 제2장 楊州夢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만당(晩唐) 최고의 시인으로 당나라의 시성 두보와 비교되어 소두(小杜)라고 일컬어지던 천재시인 두목(杜牧)이 장보고의 이름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그가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의 관인으로 양주(楊州)에 부임한 이후부터였다. 그 때가 대화(大和)8년으로 서력으로는 834년이었다.

그 무렵 양주는 기록에 의하면 7만4천여 호수, 인구는 47만에 육박하고 있던 당나라 최고의 상업도시였다.

원래 양주는 강소성(江蘇省)에 있던 도시로 옛 이름은 강두(江頭)라고 불려왔는데, 양자강(楊子江) 북방 대운하의 서쪽 기슭에 있는 이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했던 것은 수(隋)나라 때였던 589년, 이곳을 중심지로 삼은 이래 양주라고 고쳐 부르기 시작한 이후부터였다. 당대에는 강남의 물자를 운하로 북송하고 있는 그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최고의 상업도시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오늘날의 페르시아인 파사국(波斯國), 인도차이나인 점파국(占婆國), 아랍제국인 대식국(大食國) 등 서양의 상인들이 몰려들어 요즘의 홍콩과 같은 국제무역항이 들어선 이후로 이곳에는 외국 상인들의 집단거주지인 파사장(波斯莊)과 신라상인들이 모여 사는 신라방 등이 형성되어 훗날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오고 있을 정도인 것이다.

"양주의 부유함은 천하 제일로서 사람들은 흔히 이를 양주가 제일이요, 익주(益州)는 두번째라 하여서 다음과 같이 부르고 있다. '양일익이(楊一益二)'".

따라서 양주는 그 무렵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인 대 무역도시로 마침내 626년에는 이곳에 대도독부를 두어 황제의 동생인 친황이 부임하였고, 756년에는 회남절도사가 설치되어 11개주를 관장하는 국제통상의 심장부로 발전하여 당나라 최고의 부유한 도시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목은 바로 이 회남절도사의 서기(書記)로 부임하였던 것이다. 이때 두목의 나이는 한창 혈기가 왕성한 32세였다. 두목은 26세의 나이 때 동도(東都)였던 낙양(洛陽)에서 실시하는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다섯명 중의 한사람으로 급제하였다. 이때의 과거시험은 매우 예외적이었다.

당대에는 보통 왕경인 장안(長安)에서 과거시험이 열리곤 했지만 이 해만은 이례적으로 낙양에서 과거시험이 열렸던 것이다. 두목은 원래 왕경이었던 장안, 즉 경조부만년현(京兆府萬年縣) 출신이었지만 이 무렵 낙양의 강가인 번천(樊川)에 머무르고 있었다.

훗날 두목이 자신의 호를 번천으로 하였던 것을 보면 두목이 자신이 태어난 고향보다 낙양을 보다 더 사랑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두목은 주로 낙양의 강가에 머무르면서 광범위한 독서를 하며 20세 전후의 청년시절을 보냈다. 기록에 의하면 두목은 이미 20세 때 상서(尙書)·모시(毛詩)·좌전(左傳)·13대사서(史書) 등을 비롯하여 각종 병학(兵學)에도 몰두하고,특히 공자(孔子)를 '만세의 스승(萬世之師)'으로 존경하여 '이인위본(以仁爲本)'을 사상의 근본으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두목은 이 무렵 관직에 대한 관심보다 주로 나날이 쇠약해가는 당나라 조정에 대해 걱정하는 우국(憂國)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두목의 청년시절은 벼슬에 뜻을 두고 있었던 권력에 대한 야망보다 쇠퇴해가는 당나라의 조정에 대해 질타를 가하는 우국청년으로서의 열정이 더 강렬했던 저항의 계절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두목이 장보고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게 된 그 근본원인에는 바로 당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충정의 마음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음인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