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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유물로 본 내고장 역사 ① 천안 성거산 천흥사동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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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조한필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천안의 국보는 3개다. 그 중 성환 홍경사 터에 있는 비석만 천안에 있고 나머지 2개는 서울에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3층 금속공예실 입구에 대표격으로 특별 전시되고 있는 천흥사(天興寺) 동종(銅鐘). 1993년 국보 280호로 지정받았다. 천흥사는 고려시대에 현재의 성거읍 천흥리에 있었다.

이 동종이 올해로 만든지 1000년을 맞았다. 동종 한 가운데 ‘聖居山天興寺 鐘銘 統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제작연도가 밝혀졌다. 통화(統和)는 거란의 연호로 통화 28년은 고려 현종 원년인 1010년을 말한다. 당시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받아 현종이 전남 나주까지 피난 가는 등 수난을 겪는 해다. 송나라가 아니라 거란족이 세운 요(遼, 916~1125)나라 연호를 쓰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된 까닭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천안 성거의 천흥사 동종. 종 몸통에 절 이름과 제작연도(1010년)를 알리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오른쪽).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동종은 높이 167.7cm, 종구 지금 95.5cm로 고려전기 범종 가운데 가장 큰 종이다. 전체적으로 검은 색조를 띠고 있는 이 종은 문양 장식이 섬세하고 화려하다. 천사가 하늘을 나는 무늬(비천상),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뉴(꼭대기 장식으로 종을 매다는 장치) , 종을 치는 부분(당좌) 등 처리 방식이 통일신라종 특징을 이어받고 있다. 균형잡힌 종 몸체와 세부적인 예술성으로 상원사종(725년),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771년)과 함께 수작으로 꼽힌다.

천흥사 동종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기까지 여러 군데를 거쳤다. 동종의 기구한 운명은 천흥사가 폐허로 변하면서 시작됐다. 조선초기 이미 천흥사는 사라진듯하다. 동종은 그후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다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종루에 설치됐고 광주군청에도 잠시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창경원박물관(이왕가박물원)이 생기면서 그 곳을 옮겼다가 해방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다.

천흥사 언제 지어졌을까

1994년 단국대 지표조사때 발견된 ‘천흥사’ 명문 기와조각

천흥사 창건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이르면 통일신라 말 적어도 10세기 창건된 절로 추측된다. ‘하늘이 흥한다’는 천흥이란 이름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 직후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늘이 편하다’는 천안 이름은 930년 왕건이 지었다. 하늘이 편안하며 그 다음은 흥해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

천흥사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성환 홍경사는 현종이 죽은 부모를 기리기위해 1016년 착공, 1021년 완공됐다. 천흥사는 동종이 만들어지던 1010년 즈음 창건된 걸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1010년대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 두개의 거대 사찰이 한꺼번에 연속 지어졌다고 보긴 힘들다. 더욱이 현종은 1018년 당시 수도인 개성에 최대 규모인 현화사도 착공하고 있다.

천흥사는 성거산(聖居山,571m)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성거산 이름도 왕건으로부터 비롯됐다. 1530년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왕건이 직산 수헐원(지금 수헐리)에서 쉬고 있을 때 동쪽의 산 위에 오색구름이 나타나자 신이 있는 산이라 하여 제사 지내고 성거산이라고 이름지었다. 천흥사 동종이 만들어지기 약 80년 전 산 이름이 정해져 동종에 성거산이란 명문이 새겨질 수 있었던 것이다.

보물 석탑과 보물 당간지주

고려시대 천안 성거읍 천흥리 성거산 기슭에 천흥사가 있었다. 조선초기 절은 사라졌으나 5층석탑(보물 354호)이 수백년 간 절터를 지키고 있다. 왼쪽으로 최근에 지은 암자가 보인다. 작은 사진은 1917년 촬영한 석탑 모습으로 당시는 4층석탑이었으나 1966년 5층 옥개석을 찾아 복원했다. [조영회 기자]

천흥사터에는 보물로 지정된 두 개의 대형 석조물이 있다. 석탑과 당간지주다. 천흥사지 5층석탑(보물 354호)은 절의 중심지역으로 여겨지는 천흥저수지 뚝 바로 밑에 있다. 1966년 탑을 해체 복원하면서 없어졌던 5층 옥개석을 찾아 원형을 갖췄다. 당시 사리 장치도 발견됐다. 이 석탑은 기본적 양식은 신라 석탑을 계승하고 있으나 세부양식에선 변화된 모습을 보이는 고려전기의 전형적 석탑이다. 기단부가 축소돼 절제된 모습을 띤다. 기단이 낮아지고 탱주가 생략·감소됐다. 이러한 기단부 약식화는 석탑의 중심부가 기단에서 탑신으로 옮겨가는 유행의 변화를 보여준다. 옥개석 추녀 끝 부분을 날렵하게 꺾어 올렸다. 옥개받침은 4~5단에서 2~3단으로 줄었다. 탑신부는 전반적으로 웅장한 느낌을 준다.

천흥사 당간지주를 찾기는 쉽지 않다. 마을 속 깊이 숨어 있다. 당간지주 주위로 마을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당간지주로선 일찌감치 보물(99호)지정을 받았다. 높이 330cm.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말 그대로 당간을 지탱하는 돌 기둥이다. 당은 천으로 만든 불교 행사 등을 알리는 깃발인데 우리나라엔 남아있는 예가 없다. 당간은 이 당을 꽂는 깃대다. 금속 혹은 나무로 만드는 데 철제 당간은 청주시내 용두사터 및 계룡산 갑사에서 볼 수 있다.

150년 전엔 당간이 있었다는데 …

5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약 300m 떨어진 마을 한가운데 있는 당간지주. [조영회 기자]

천흥사 당간도 150년 전까지 남아있었다. 1860년대 김정호가 지은 인문지리지 『대동지지』에 “국초(國初, 조선시대 초기) 폐사된 천흥사에 고려시대(918~1392) 세운 철장이 있는데(有高麗時所竪鐵檣) 길이가 24마디로 한 마디는 10척”이라고 했다. “꼭대기에는 수백근의 은을 장식했고 멀리서 봐도 구름과 하늘을 찌르듯 서 있다”며 그 웅장함을 묘사하고 있다. 철장은 철로 만든 당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당나라때(618~907) 세운 구리로 만든 깃대가 있었다(有唐時所竪銅檣)고 쓰여있다. 두 기록은 만들어진 시기와 재료를 다르게 적고 있다. 뭐가 맞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여하튼 그 당간은 지금 없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대원군이 당백전 주조를 위한 공출할 때 사라졌다고 한다.

저수지 때문에 둘로 갈라진 천흥사 터

석탑과 당간지주는 약 300m 떨어진 곳에 있다. 석탑과 당간지주의 현 자리는 원래 세워진 자리다. 당간지주가 절 입구에 세워진 관례를 감안할 때 사찰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두 유물 사이로 마을을 가로질러 천흥천이 흐른다. 천흥사는 사찰 안에 하천이 흐르는 넓은 절이었다. 현재 석탑 앞에는 천흥천과 사이로 넓은 사과나무 과수원이 자리잡고 있다.

또 하나의 천흥사 유물로 이곳에서 3~4km 떨어진 성거산 중턱의 만일사(晩日寺) 관음보살상이 있다. 일제강점기 사금을 채취하던 사람들에 의해 천흥사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일제 말기 철물 공출시 일본인이 매입해 보관하다가 당시 만일사 주지가 거둬 보관했다고 한다. 불상 뒷면의 ‘통화20년 천흥사’명문으로 목종 5년(1002년) 만들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천흥사터는 1987년부터 8년여 걸쳐 단국대 역사학과에서 학술조사를 실시했다. 주로 5층석탑 부근 중심으로 유물조사를 했다. 건물 기둥을 올렸던 주춧돌과 섬돌 층계나 축대를 쌓는 데 쓰이던 길게 다듬은 돌(장대석) 여러 개를 발견했다. 깨진 기와더미 속에서 ‘천흥사(天興寺)’글씨가 확연히 드러나는 기와 여러 조각을 찾아내기도 했다. (『천흥사지 학술조사보고서』성환문화원, 1994년)




고려 현종과 1010년
거란 침입에 천안 거쳐 피난길

현종은 누구이고, 천흥사 동종이 만들어지던 1010년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현종은 천추태후(964~1029)와 김치양(?~1009)으로부터 생명을 위협받으며 구사일생으로 살아 결국 왕위에 오르는 행운의 사나이다.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아들 왕욱(안종 추증). 어머니는 헌정왕후 황보씨로 원래 경종의 네번째 비였다. 경종이 죽고 궁을 나와 살다 이웃에 살던 왕욱과 사귀어 왕순(현종)을 낳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왕순을 낳자마자 죽는다. 당시 왕인 성종은 아이를 보모에게 맡겨 기르게 하고 왕욱은 현재의 경남 사천으로 유배보낸다.

어느날 어린 왕순이 궁에 들어와 성종을 대면했는데 성종의 무릎 위로 기어올라와 “아비, 아비”하며 불렀다. 성종이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왕욱에게 보냈다. 왕순은 아버지 왕욱이 사망하는 996년까지 귀양지에서 함께 살았다. 이듬해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 해 천추태후와 경종 사이에서 낳은 아들(목종, 980~1009)이 왕위에 오른다.

왕순은 12세 때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졌으나 천추태후가 김치양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그를 절로 보내 승려로 만들었다. 이후 숭교사에 왕순을 죽이려는 자객들이 자주 들이닥치자 1006년(15세) 신혈사(현재 서울 진관사)로 거처를 옮겼다. 그래도 김치양이 대량원군의 목숨을 계속 노리자, 신혈사 주지승인 진관대사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땅굴을 파 그 곳에 대피 시킨 뒤 그 위에 침대를 놓아 은폐하는 기지로 위기를 모면한다. 1009년 2월 서북면순검사 강조(康兆)가 김치양과 그의 아들을 제거하고 목종을 폐했다. 왕순이 왕(현종)이 되는 순간이다.

1010년이 됐다. 현종은 음력 2월 성종이 없앴던 불교행사 연등회를 부활시켰다. 현종은 11월엔 팔관회도 부활시켰다. 이로써 고려의 가장 큰 불교행사 모두 부활됐다.

1010년 음력 11월 거란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40만명 군사를 몰고 침입한다. 강조가 30만 군대로 방어했으나 패하고 개경이 점령당한다. 현종은 지채문의 호종을 받아 피난길에 나선다. 50여 명 신하만이 그를 따랐다. 우리 역사상 가장 비참한 몽진(蒙塵,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난리를 피해 떠나는 것) 이었다. 현종은 지방 감영 아전에게 병장기를 빼앗기고 경기도 적성현에선 무뢰배들이 그에게 활을 쏘았으며, 공주를 나오면서 임신한 왕후마저 떼어놓고 피난해야 할 정도였다. 이 때에 공주에서 머물다 김은부의 딸과 관계를 맺어 나중에 그의 딸들이 왕후가 된다. 전주에선 절도사 조용겸의 납치 위협을 겪기도 했다. 이 기간 고려의 중앙정부는 사실상 와해된 상태였다.

현종이 천안지역도 통과했다. 그 때 일화를 『고려사절요』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사산현(직산)을 지나다가 지채문이 기러기떼가 밭에 내려앉은 것을 보고 왕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말을 달려 기러기를 놀라게 해 날린 후, 활로 쏴 떨어뜨렸다. 그리고 “신하 중에 저같은 사람이 있사온대 도적(거란군)을 어찌 근심하겠습니까”말하니 현종이 크게 기뻐했다. 또 천안부에 이르니 신하 유종과 응인이 “신들이 먼저 가서 음식을 준비해 영접하겠습니다”하고는 도망갔다. 이런 상황에 현종이 천흥사를 들를 여유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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