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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f&] 보르도 와인 … 챔피언의 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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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7면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달콤쌉싸래한 와인의 향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와인의 메카로 불리는 프랑스 보르도. 이 지역에선 골프도 포도주와 떼어놓을 수 없다. 로마 시대부터 포도주 산지로 이름난 생테밀리옹의 보르도-카메이락 골프장은 와이너리를 갈아엎어 만든 곳이다. 페어웨이 옆으로는 포도나무들이 즐비했다. 가을날에는 와이너리 쪽으로 오비(OB) 한두 번쯤 내도 괜찮을 것 같다. 이 골프장의 매니저 미셸 샤롱은 “공을 주우러 가서 잘 영근 포도 한두 송이로 목을 축여도 된다”고 말했다.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코스들은 와인처럼 낭만적이다. 골프 코스의 거리 표시목은 와인병 모양이다.

와인의 주산지인 프랑스 보르도엔 와이너리와 인접한 골프장이 많다. 앞쪽은 골프 코스, 뒤쪽은 포도밭이다. 골퍼들은 가을이면 포도송이를 따먹으며 라운드 할 수 있다. [보르도 와인협회 제공]

골프 코스 12개가 있는 보르도는 파리를 제외하면 프랑스에서 골프장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 보르도에서 가장 좋은 골프장으로 꼽히는 ‘골프 두 메도크’ 샤토(와이너리) 코스는 홀마다 유명 와이너리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10번 홀의 이름은 ‘샤토 라 뮬랭’, 15번 홀의 이름은 5대 그랑 퀴르인 ‘샤토 무통 로칠드’ 식이다. 골프를 좋아하는 양조장 주인들이 홀에 자기네 와인 이름을 붙여달라고 로비까지 한다고 한다. 샤토 라그랑즈라는 이름을 단 1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 섰을 때는 스코틀랜드의 링크스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가시금작화와 황량한 벌판, 커다란 벙커 같은 스코틀랜드를 닮은 풍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르도는 골프의 고향인 세인트 앤드루스와 피처럼 진한 와인으로 연결돼 있다. 지금은 프랑스의 도시이지만 보르도는 12세기에서 15세기까지는 영국 땅이었다. 질 좋은 클래릿(보르도 레드 와인)을 영국인들이 마셨다.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직전 200척의 배가 클래릿을 싣고 지롱드 강을 따라 영국을 향해 떠났다고 한다. 보르도가 프랑스로 병합된 후엔 영-불 관계가 견원지간이 됐고 그 결과 영국에서 클래릿은 매우 비싸졌는데 첫 브리티시 오픈(1860년) 직전 두 나라 관계가 좋아졌다. 크림전쟁에서 동맹국으로 싸워 이겼기 때문이다. 브리티시 오픈 챔피언은 클래릿을 마시게 됐고 그래서 보르도 와인은 챔피언의 술이 됐다.

브리티시 오픈의 챔피언 트로피는 잘 알려진 대로 은으로 만든 클래릿 저그(claret jug)다. 와인을 컵에 따르기 전에 부어 마시는 일종의 디캔터다. 대회가 시작된 19세기 중반 영국에서는 와인을 병째로 식탁 위에 올려 놓는 일은 야만스러운 짓으로 여겼다. 특히 최고의 와인인 클래릿에는 화려한 디캔터를 썼다.

포도주가 담긴 오크통에는 샷을 하는 골퍼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사진 위쪽). 보르도의 골프 코스는 거리 표시목을 와인병 모양으로 만들었다. [보르도 와인협회 제공]

와이너리 주인들 중엔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양조장 주인들은 요즘도 빈티지 컵이라는 골프 대회를 연다. 샤토 몽데지르-가쟁의 주인인 마르크 파스케는 “골프와 와인은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와이너리와 마찬가지로 골프도 코스마다 뚜렷한 개성을 가진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골프와 와인은 둘 다 에티켓이 중요하며, 그날의 동반자와 기분·날씨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라고 덧붙였다.

좋은 와인을 만들기는 싱글 골퍼가 되기만큼이나 어렵다. 그랑 퀴르 와인을 만드는 포도나무는 다른 작물이 자라기 어려운 자갈밭에서 뜨거운 태양과 가뭄, 혹독한 일교차를 견뎌야 한다. 보르도 포도나무의 줄기는 1m도 채 안 되지만 뿌리는 물을 찾아 단단한 바위를 뚫고 지하 30m까지 내려간다. 그러면서 바위 속의 미네랄과 양분을 포도송이에 전달한다.

골프가 탄생한 스코틀랜드의 링크스 땅도 황무지다. 염분이 많고, 종종 파도에 휩쓸려 잔디를 제외하면 다른 식물이 자라지 못한다. 톰 모리스나 벤 호건, 타이거 우즈, 최경주는 링크스처럼 척박한 환경에서 꽃을 피웠다. 좋은 와인은 피니시가 우아하고 길다. 좋은 스윙 역시 피니시가 아름답다. 골프와 와인 모두 성공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애호가들은 점점 더 특별한 것을 찾는다. 오래된 샤토가 그렇듯 오래된 코스는 역사의 향기와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와인의 향은 흔히 테루아라 부르는 와이너리의 자연 환경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골프 코스에서도 잔디 종류와 벙커의 모래질을 잘 파악해야 한다.

현재 영국에서 마시는 보르도 레드 와인인 클래릿은 19세기 중반 브리티시 오픈 챔피언들이 마시던 포도주와는 다르다. 클래릿은 프랑스어로 ‘맑다’는 뜻이었다. 당시 오크통에서 숙성을 하지 않고 발효가 끝나면 바로 배에 실어 영국으로 보냈기 때문에 지금의 레드 와인보다 색깔이 훨씬 옅었다고 한다. 클래릿은 맑은 루비빛이었는데 요즘의 레드 와인은 검붉은 색이 대부분이다.

보르도에서는 전통을 기리기 위해 영국으로 수출하던 과거의 맑은 적포도주를 생산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클레레(Clairet)’라고 불리는 이 와인은 생산량이 연간 700만 병 정도인데 양이 부족해 한국은 물론 다른 나라에 수출하지 않는다. 클레레는 빛깔과 타닌이 로제와 레드의 중간쯤이다. 시원하게 마실 수 있고 충분한 산도가 있으면서 향이 풍부하고 가벼워 봄, 여름 라운드 이후에 좋을 것 같다.

보르도=성호준 기자



와이너리 오너들이 ‘강추’한다

골프 초창기 브리티시 오픈 챔피언들이 맛보던 진짜 클래릿을 맛보려면 보르도로 가야 한다. 보르도에는 수만 종의 와인이 있다. 보르도의 와이너리 오너들과 라운드를 하면서 골프 상황별로 어울리는 와인은 어떤 것인지 물어봤다.

좋은 친구와 함께 라운드한 후 마시는 와인

샤토 리요나(Chateau Lyonnat) 이 와이너리 주인 제라르 밀라드는 보르도 와이너리 주인들의 골프 대회인 빈티지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골프광이기도 하다. 밀라드는 샤토 리요나를 권하면서 이 와인은 메를로의 부드러움과 풍부한 아로마가 오랜 우정을 닮았다고 주장했다.

비즈니스 라운드에 어울리는 와인

샤토 스미스 오 라피트(Chateau Smith Haut Lafitte) 화이트 풍부한 과일향과 벌꿀향이 느껴지며 크리스피한 맛이 있어 분위기를 전환하기에 좋다. 주인 부부는 프랑스 스키 대표 출신으로 사업에서 큰 성공을 해 그랑 퀴르 와이너리를 샀다.

가족 라운드에 어울리는 와인

샤토 그랑 비로(Chateau Grand Bireau) 바르트 가문이 8대째 대를 이어 운영한다. 다른 화이트 와인과는 달리 오크통 숙성을 거쳐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한 조상을 기리기 위해 장 르 그로라는 스페셜 퀴베(와인 양조용 탱크)도 만든다. 해산물과의 궁합이 완벽하다.

연인과의 로맨틱 라운드에 어울리는 와인

무통 카데(Mouton Cadet) 로제 입안을 채워주는 상쾌한 산미와 잘 익은 과일의 맛이 잘 어우러진 드라이 로제 와인이다. 핑크빛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드라이브샷을 멋지게 날린 뒤 마실 만한 와인

샤토 코스 데스투르넬(Chateau Cos d’Estournel) 메도크 와인 중에도 강한 향기와 뚜렷한 개성을 지닌 남성적인 와인이다. 강렬한 풍미는 충분한 숙성을 거듭할수록 잠재력이 드러난다.

최악의 라운드 이후에 어울리는 와인

샤토 샤스 스플린(Chateau Chasse-Spleen) 근심을 쫓아낸다는 뜻이다. ‘악의 꽃’을 쓴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가 이 와인을 마시고 고통을 잊어 이렇게 멋진 이름을 헌사했다고 한다. 우아한 향과 혀끝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질감이 잔잔한 즐거움을 준다.

홀인원을 했을 때

샤토 무통 로칠드(Chateau Mouton Rothschild) 말할 것도 없이 최고의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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