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미국·일본 엔저 '뉘앙스 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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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도쿄(東京)를 방문 중인 폴 오닐 미 재무장관이 지난 22일 외신기자들이 몰려든 현장에서 잔뜩 짜증을 냈다. "나의 신조는 누가 말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는 것이다."

다름 아닌 자신의 카운터파트인 시오카와 마사주로(鹽川正十郞) 일 재무상을 겨냥한 말이었다. 아주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시오카와 재무상은 이날 오전 양국 재무장관 회담 후 기자들에게 "오닐 미 재무장관이 '환율은 시장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고 말했다"고 털어놨었다.워싱턴 포스트지는 이를 '뉘앙스의 싸움(war of nuances)'으로 표현했다.

이후 시장은 오닐이 엔저를 용인한 것으로 해석, 엔화가치가 달러당 1백33엔대 후반으로 급락했다. 엔화는 23일에도 약세를 거듭해 한때 1백34엔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 오닐 장관의 의중은=지난해 9.11 테러가 터지던 날 그는 도쿄에 막 도착했었다. 일본 경제 회생책에 대해 얘기를 나눌 틈도 없이 바로 돌아서야 했다.

이번엔 아프가니스탄 자금지원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왔지만 사실 그건 국무장관 소관이었고, 그에게 더 큰 이슈는 경제문제였다.

그는 22일 기자들에게 분명하게 말했다."환율을 인위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일종의 보호주의다. 환율조정은 산더미처럼 쌓인 일본의 부실채권을 해결하거나 생산성을 높이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오닐이 이처럼 강하게 나오자 시오카와는 23일 "환율과 부실채권은 별개 문제라는 오닐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전날 회담에선 엔저의 영향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다"며 한발 물러서고 말았다.

환율문제는 오닐이 1년 전 취임할 당시부터 민감한 사안이었다. 미국 재계는 경영인(세계 최대 알루미늄제조업체 알코아사) 출신인 오닐이 재무장관이 되자 그가 미 기업들을 위해 '강한 달러'정책을 바꿀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 재계는 계속해서 같은 압력을 넣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 그는 이번 방일에서 골치아픈 환율문제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말을 아낄 참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발언이 엔저를 용인한 것으로 번져나가자 긴급 진화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오닐 해명 시장엔 안먹혀=도쿄의 외환전문가들은 그가 자국 수출업계를 염두에 두고 긴급 해명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엔저에 제동을 걸진 못할망정 맞장구를 쳤다는 비난이 두려웠다는 얘기다.

엔저에 대해 그동안 부시 행정부는 사실상 불가피성을 인정해 왔다. 일본의 침체가 세계 경제회복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오닐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외환시장 전문가들은 미국이 엔저를 강하게 반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엔화가 23일 속락한 것이 그걸 말해준다. 일본 정부는 최근 몇달 동안 거의 공개적으로 엔저 유도정책을 펴왔다. 수출경쟁력을 높이고 디플레이션을 잡는 데 이만한 수단이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 우리 정부는 어떻게 보나=미국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강한 달러를 위해 엔저를 용인하면 우리로서는 걱정스러운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엔저를 원하는 것으로도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튼 정부는 일본이 엔화 약세를 통해 경기회복을 노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필요하면 중국 등과 공동 대응한다는 입장이다.

도쿄=남윤호 특파원, 서울=주정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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