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미치게 만드는 수, 9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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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8강전
[제6보 (88~110)]
黑. 송태곤 7단 白.왕시 5단

우상에서 깊은 상처를 입은 송태곤7단의 가슴이 끓는 물처럼 지글거리고 있다. 그 후폭풍으로 우하에서 사나운 변화가 일어났다. 송태곤이 왕시5단의 응수타진을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잡혀있던 백△ 두 점이 살아나간 것이다. 그냥 살아간 것이 아니라 흑▲ 석점을 잡아버렸다.

이 참극(?)은 흑이 이성을 잃고 폭주한 결과일까.

아니다. 승부란 때때로 '올인'이 불가피하다. 비상국면에 접어든 흑은 이제 작은 것에도 목숨을 걸어야 하며 끊임없이 지뢰밭을 걸어야 한다. 그는 살점이 찢어지는 아픔도 마다하지 않으며 폭풍처럼 우변 백에 달려든다. 91은 전리품.

바로 이때 92라는 따끔한 한 수가 등장했다.

"미치게 만드는 수군요"라고 박영훈9단이 말한다. 92는 모기가 무는 듯 가벼운 수다. 그러나 흑의 폭풍을 잠재우는 데는 이 한 수로 충분하다. 중앙 한점이 끊기므로 흑은 바로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참고도' 흑1로 물러서는 것은 최악의 사태를 부른다. 백2, 4가 놓이면 쫓기던 백이 화려하게 일어서면서 오히려 A의 치중수로 귀의 사활까지 노리게 된다.

별것도 아닌 듯 보이는 92가 송태곤을 미치게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목숨을 걸라면 걸겠지만 전력을 집중해 공격하는 이런 순간에 나사가 빠진 듯 한발 물러서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결국 93으로 받고 96까지 한점을 내줘야 했다. 이 틈에 왕시는 102(⊙의곳)에 이어 우변을 완생했고 106, 110 등으로 흑의 파상공세를 잘 받아내며 우세를 다져나가고 있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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