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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에 헌신한 천도교 지도자 오세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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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근대화를 꿈꾼 개화정객이자 천도교 지도자로 민족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던 오세창(吳世昌·1864~1953). ‘조충(彫蟲·새김벌레)’이란 별명이 있을 만큼 전각에 뛰어났던 그는 부친 오경석과 자신이 수집했던 고서화와 금석탁본 등을 모아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펴내는 등 일제하에서 이 땅의 문화와 전통을 굳건히 지켜낸 우리 얼 지킴이였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세창은 8대가 역관(譯官)을 지낸 중인(中人)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오경석은 서구열강이 일으킨 격랑(激浪)의 여파가 쇄국의 빗장 아래 깊이 잠들어 있던 조선왕조에도 밀려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서양의 문물을 소개하는 신서적을 베이징에서 사 날라 박규수 문하의 김옥균·박영효·유길준 등 양반들이 서구를 따라 배울 마음을 품은 개화파로 진화하게 만든 디딤돌이었다. 또한 그의 스승 유대치도 개화파로부터 ‘백의 정승’으로 불릴 만큼 큰 존경을 받은 선각이었다. 이 두 사람의 영향으로 그는 개화사상을 가슴에 품었다. 16세 때인 1879년 역과에 합격해 가업을 이은 그는 1886년 박문국 주사(主事)로 ‘한성주보’ 발간에, 1894년 군국기무처 낭청(郎廳)으로 갑오경장 추진에, 그리고 1896년 독립협회 간부로 근대화운동에 힘을 보탰다. 그때 그는 중인이란 신분적 주변성을 넘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한, 앞서 깨달은 자였다.

1902년 그는 유길준이 주도한 쿠데타 계획에 연루되어 몸을 피한 일본에서 손병희를 만나 동학에 귀의했다. 두 사람은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민족이 살아남기 위해 일본식 문명개화를 따라 배워야 한다는 데 의기투합했다. 1906년 1월 손병희와 함께 귀국한 그는 천도교를 창건해 ‘합방론’을 주장하는 일진회에 맞서 민족종교 동학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의 선봉에 섰다. “일본의 선량한 지도를 믿고 실력을 양성해 타일에 자치를 기도한다.” 그때 그는 일제의 침략에 순응하는 자치론을 펼친 대한협회가 1909년 6월 2일 창간한 ‘대한민보’의 사장에 취임하는 우(愚)를 범했다. 그러나 그가 민족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대한독립만세!” 삼창이 울려 퍼진 서울 인사동 태화관(泰和館)에 그는 천도교 대표의 한 사람으로 거족적 민족운동의 첫 불꽃을 지핀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있었다.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가”라는 판사의 질문에 “그렇다. 될 수만 있다면 독립하고 싶다. 이번 운동은 조선민족이 같은 뜻으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일본 정부에 대해 힘을 합쳐 싸울 것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3년의 옥고를 달게 치렀다. 출옥 후 암울하고 모진 일제 치하를 실절(失節)하지 않고 견딘 그는 81세 때 다시 이 땅에 빛이 켜지는 기쁨을 누렸다. 1949년 3월 20일 열린 반민특위 재판정에 태극기와 함께 걸린 친필 휘호 ‘민족정기(民族正氣)’는 그의 올곧은 민족 사랑을 명증(明證)한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