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통령 회견 스케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오늘 기자회견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국민 여러분께 죄송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그것은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일부 벤처기업들의 비리사건입니다… 제가 선두에 서서 비리척결에 앞장서겠습니다."

1백93명의 내외신 기자가 참석한 가운데 70여분간 진행된 연두회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요즘 돌아가는 일들 때문에 자신도 정신을 차릴 수 없다고 토로했다.

그의 목소리는 쉬고 갈라져 있었다. 뺨은 야위었고 눈두덩 부분은 아래로 처져 있었다. 회견 도중 간간이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측근들까지 연루의혹을 받고 있는 부패문제를 얘기할 때는 안타까워하는 모습이었다.

金대통령은 전날 밤에 가까스로 정리된 신승남(愼承男)전 검찰총장의 거취문제 등에 대한 고심으로 거의 잠을 못이뤘다고 청와대 관계자들은 전했다.

金대통령은 모두(冒頭)발언에서 이례적으로 강도를 높여 대국민 사과를 했고 부패척결 의지를 천명했다. A4용지 10쪽에 이르는 모두발언 원고는 金대통령이 밤새 고민하면서 직접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이트'와 관련해선 '죄송하다'는 말을 세번 했으며, 지난해 수학능력시험이 어렵게 출제돼 학부모.학생들에게 사과하는 대목에선 '미안하다'고 하는 등 죄송과 미안이라는 표현을 세번씩, 여섯번이나 사용했다.

야당이 제기한 인사편중 시비에 대해서도 金대통령은 수용적인 자세를 보였다."인사정책은 참 어렵다. 내가 한 인사를 다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인사를 해놓고 보니 잘 안된 것도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는 "이러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했다.

개각과 관련, "이한동 총리와 (진념)경제팀을 이번 기회에 바꾼다는 말도 있다"는 질문에 金대통령은 "당사자들을 앞에 놓고 말을 하라고 하면 나오던 말도 도로 들어가는 것 아닌가"라고 해 폭소가 터졌다.

통일.외교.안보팀 교체 문제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홍순영(洪淳瑛)통일부장관의 표정이 다소 굳어지는 듯했다.

金대통령은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아쉬움이 적지 않은 듯했다. 그는 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답방에 대해 "문서상으로는 확실히 돼 있지만 여러분이나 내가 다 알고 있듯이 불투명하다"고 말했다.

金대통령은 지난해 회견에선 "金위원장의 서울 방문이 약속대로 실현되도록 노력하겠다"고 강한 자신감을 피력했었다.

경제분야 전망에서 金대통령은 "세계 경제가 바닥을 치고 있으나 올 상반기부터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며 "올 하반기엔 U자형이나 V자형의 경기회복을 기대할 수 있으며 저는 V자형 상승곡선을 기대하고 있다"며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희망을 표시했다.

金대통령은 이날 "집권 마지막 해인 올해""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등 임기 말을 연상시키는 표현도 많이 썼다.

그는 평생 자신의 전문분야인 정치문제에 대해선 가능한 한 언급을 피하고 경제.민생.남북.월드컵 성공의 강조로 비워진 공간을 메우려 했다.

金대통령이 이날 회견에서 부패문제에 대해 사과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한 척결의지를 밝혔음에도 친인척 얘기를 꺼내지 않은 것에 대한 지적이 회견 뒤에 제기됐다.

회견을 마친 청와대 기자실엔 "金대통령의 아들 문제에 대한 기자들의 문제제기가 왜 없었느냐"는 항의와 "金대통령이 이 문제를 정면으로 언급했어야 했다"는 일반 시민들의 비난전화가 걸려왔다.

반면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지난 4년 동안 있었던 회견과 비교해 볼 때 金대통령은 어느 때보다 자신의 입장을 진솔하게 표시했으며 성실도 높은 답변을 했다"고 자평했다.

전영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