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 살아난 경기 ‘반도체 착시’ 주의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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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시(錯視). 시각적인 착각 현상 때문에 실제 모습과 눈으로 보는 것이 다를 때 쓰는 말이다. 경기에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 최근 반도체산업 경기가 30년 만의 호황을 누리면서 전체 경기지표도 덩달아 좋게 나타나는 ‘반도체 착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경기지표는 올 들어 호조다. 1분기 전체 광공업 생산은 전년 동기비 25.6% 증가했다. 수출은 4월에 31.5% 늘면서 44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냈다. 이런 경기회복의 일등 공신은 반도체다. 1분기 반도체 생산은 전년 동기비 59.2% 증가했다. 광공업 생산증가율 25.6% 중 반도체가 10.3%포인트를 담당했다. 전체 생산 증가분 중에서 반도체 비중이 40%가 넘는다는 얘기다. 반도체가 없었으면 생산증가율이 15.3%로 떨어졌을 것이란 추론도 가능하다.

수출도 마찬가지다. 올 1~4월의 무역흑자가 76억8000만 달러인데, 메모리 반도체의 흑자가 70억 달러에 이른다. 이쯤 되자 통계청도 3월부터 ICT(전자부품·컴퓨터·영상음향통신) 업종을 제외한 지표를 별도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통계청 윤명준 과장은 “반도체 경기가 전체 경기지표에 큰 영향을 미친다”며 “경기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ICT 업종을 제외한 지표를 산출했다”고 말했다.

반도체 호황엔 이유가 있다. 스마트폰 보급이 빠르게 늘어난 데다 TV에 들어가는 반도체는 많아졌는데, 지난해 금융위기를 전후해 업계가 신규 투자를 꺼린 바람에 극심한 공급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1기가D램 가격은 지난해 4월 1.09달러에서 올 4월 2.97달러로 치솟았다. 반도체 호황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권오현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사장은 최근 “적어도 올해까지는 D램 공급이 달릴 것”이라며 “(삼성은) 2분기 반도체 실적이 1분기보다 더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반도체를 제외하면 경기를 낙관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이미 올 하반기에 경기가 둔화할 것이란 징후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6~9개월 후의 경기 상황을 예고하는 선행지수 전년 동월비는 3개월 연속 하강했다.

정부는 하반기에 상반기처럼 돈을 풀 여력이 없고, 주요 수출시장인 유럽의 경기는 최근의 재정위기로 얼어붙고 있다. 올 상반기에 반도체 다음으로 기세가 좋았던 자동차 업종만 해도 신차 효과가 끝난 하반기엔 성장세가 한풀 꺾일 전망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30일 보고서에서 “올 하반기에는 대내외 경제불안 요인으로 상반기보다 낮은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라며 “상반기 6.7%, 하반기 3.7% 성장”을 전망했다.

반도체 호황으로 전체 경기에 대한 판단을 그르친 경우는 외환위기 직후에도 있었다. 1998년 7월~2000년 9월 반도체 생산은 53.9% 증가하며 경기회복을 이끌었다. 인터넷 열풍에 힘입은 개인용컴퓨터(PC) 수요 증대와 휴대전화 보급 확산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기는 완전히 회복된 것처럼 보였다. 외환위기 때 거론됐던 여러 개혁 조치 중 상당수가 흐지부지된 데는 이런 낙관론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이번에도 반도체 착시가 전체 경기에 대한 판단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우려되고 있다. 경기둔화 신호가 있는데도 이를 포착하지 못하면 결국 정책대응에 실기하게 된다. 반도체 호황을 마냥 즐거워할 수 없는 이유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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