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오태석의 '지네와 지렁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3면

극작.연출가 오태석씨의 연극관은 언뜻 쉽고 명쾌해 보인다. 언젠가 그와 나눈 대화에서 찾은 단서는 이렇다. "연극이 별거냐. 옛날 우리네 아버지.할아버지가 논두렁에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두서없이 내뱉던 그 말과 풍경이 바로 연극이지."

그의 전작 대부분은 이런 생각의 실현에 다름아니었다. 예의 논두렁식 대화법과 전개양식. 한마디로 비논리적이며 어수선한 게 '오태석표 연극'(연극평론가 김방옥은 이를 '탈(脫)논리의 유희성'이라고 표현했다)의 특징이다.

그의 신작 '지네와 지렁이'도 그런 꼬리표를 달았다. 내용 구성의 '논리 없음'과 마구잡이 같은 놀이가 혼재된 수다스러움은 영락없이 그의 것이다. 게다가 전통연희의 현대적인 변용과 모색이라는 덧씌움도 흔히 보던 오씨의 시도다.

연극은 2010년 이야기다. 나라는 망하기 일보 직전이다.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인공호흡기를 단 사람들은 1천7백m의 지하에서 정수된 물을 받아먹고 산다.

이민자 행렬은 늘어만 간다. 모두 '집단망각증'에 걸린 이 나라는 국치 1백년 만에 다시 일본에 먹힐 운명에 처해 있다.

배우들은 이런 내용을 서로 들고, 나고, 끼어들며 두서없이 펼쳐나간다. 노래와 춤은 시공을 넘나들며 뒤엉킨다.

연극은 이런 형식의 젖줄을 전통의 산대놀이에 대고 있는데, 그것의 변용은 아무튼 유쾌했다. 이제 남은 것은 보는 이의 몫. 그런 놀이판에서 배우들이 내뱉는 이야기를 제 방식대로 주섬주섬 챙기는 일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뭘 어떻게 챙겨야 할 지 가닥이 안잡혔다. 기승전결의 논리를 앞세운 서양식 드라마에 길들여진 내 입맛과 독법(讀法) 탓인가. 그래서 우리네 논두렁 이야기처럼 쉽다는 오씨의 연극이 외려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인가.

그것은 이것 저것 늘어 놓은 형식의 무질서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질서를 구현하는 주제의 뒷심이 빈약한 탓이다.

친일파.분단 문제 등 일관된 관점이 없이 좌충우돌하는 에피소드들의 난무도 그렇고. 우화적 상상력의 저류에 깃든 사회를 보는 대가(大家)의 깊은 통찰력도 아쉽다. 2월 17일까지 소극장 아룽구지.

02-745-3966~7.

정재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