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한국사회 '비판적 지지자' 커밍스와 박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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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책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 브루스 커밍스의 칼날이 좀 무뎌졌나?" 한국 현대사와 관련해 비판적 시각을 유지해온 커밍스가 지난해 펴낸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작과 비평사)의 앞대목이 꼭 그랬다.

단군신화에서 오늘에 이르는 한국사 전체를 균형있게 서술한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고단했던 현대사 속의 한국인들을 위무(慰撫)하려는 듯 이런 인상 깊은, 그리고 따듯한 덕담을 던지고 있다.

"(한국은)제국주의 시절 고래등에 낀 새우였고, 냉전시대에는 강대국 사이에 양쪽 볼이 맞닿을 정도로 꼼짝달싹 못하게 끼어버린 약소국이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가난하고 분단된 국가였던 한국은 이제 세계 속에 적절한 위상을 다시 차지한 나라다.

"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근대화라는 저울'의 눈금상으로 볼때 한국의 지난 20세기 첫 시작은 저울의 맨 밑바닥을 기었다.

그 가난하고 '고래등에 낀 새우'는 놀랍게도 거의 꼭대기에 오른 상태에서 20세기의 끝무렵을 마감했다. "상대적으로 소수인 선진산업국들이 벌이는 산업시대의 경쟁에 합류했다"는 게 커밍스의 또 다른, 한국사회에 대한 평가다.

지난 주 리뷰기사를 내보낸 박노자 교수의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을 읽으며 내내 커밍스가 떠올려졌다. 한국학에서의 높은 학문적 경쟁력이 그렇고, 이념의 스펙트럼으로 분류해 중도 좌파에 속하는 비판적 시선도 닮은꼴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박노자는 커밍스가 갖는 제1세계 지향과 판이하다. 귀화 전의 조국이 러시아이고, 뚜렷한 탈(脫)서구 의식이 합쳐져서인지 그는 한국의 경제성장이란 것이 과연 인류애에 부합하는 '진지한 모더니티의 성취'인지를 거듭 묻는다.

맹목적 경제성장이 서구의 근대화 내지 부국강병 논리를 베끼려는 일그러진 욕망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것이 메이지유신 이후 일제가 심은 환상이라는 말도 한다. 추상적인 담론이 아니다.

그가 더없이 진지하게 지적하는 동남아 노동자나 심지어 중국동포.탈북자에 대한 인종주의적 차별-이 책의 주된 공격목표이기도 하다-이 바로 그 대표적 폐해다. 그가 그토록 숨막혀하는 '한국사회의 국가주의'도 일그러진 근대화 속을 출몰하는 망령(亡靈)에 다름 아니다.

결국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 적나라하게 노출이 된 한국호에 대한 비판이고, 그걸 근대화 담론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한 특기할 만한 책이다.

정신이 번쩍 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임을 고백한다. 바꿔 말하면 밥 숟가락 좀 들게 됐다고 턱없는 자기만족과 오만에 빠진 우리를 각성시키는 '책으로 된 죽비'이기도 하다. 커밍스가 과거 이데올로기에 갇힌 우리에게 비판적 시야를 열어줬다면, 박노자는 한국사회의 진정한 성숙을 돕는 비판적 지지의 새로운 목소리인 셈이다.

마침 지난 1일자 본지는 '업그레이드 코리아' 10대 국가 과제를 선정했다. 해서 꼽힌 게 '대통령, 제왕에서 CEO로' '예산 1% 대북지원에'등의 국가적 어젠다들이다. 새해 벽두 관심있게 다가오는 사안들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꿈은 한번 크게, 그리고 제대로 품어볼 일이다. 즉 우리의 근대화 경험이 소아병적 국가 부(富)의 창출단계를 넘어 지구촌의 유의미한 경험으로 어떻게 바꿀 것인가가 중요하다. 근대화 저울의 눈금 높낮이가 문제가 아닌 셈이다. 그게 우리 사회의 근본적 과제다.

조우석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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