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f&] 골프장 소풍 오세요, 아이들과 오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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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셰프 복장에 주방장 모자를 쓴 서원밸리 최등규 회장이 그린 위에서 깃발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최 회장은 10년째 그린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2004년 여름, 서울 인근의 한 골프장에서 50대 후반의 사업가와 라운드할 기회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1m80㎝ 가까운 큰 키가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그늘집에서 수박을 먹으며 갈증을 달래던 기자는 이 사업가의 예사롭지 않은 행동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사람들은 수박의 붉은 부분만을 먹고 버리는데 이 사업가는 흰색 껍질 부분이 나올 때까지 수박을 갉아먹은 뒤에야 껍질을 버리는 것이었다. 수박을 껍질까지 먹는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초면이라 꾹 참았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른 2010년 5월, 그와 마주 앉을 기회가 생겼다. 이 사업가의 이름은 최등규(61), 서원밸리 골프장(경기도 파주)을 운영하는 대보그룹 회장이다. 최 회장은 2000년부터 서원밸리 골프장에서 그린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다. 그린 콘서트란 말 그대로 골프장의 푸른 잔디 위에서 열리는 콘서트.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수박 이야기부터 꺼냈다.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수박을 껍질째 드시더군요. 지금도 수박을 그렇게 드시나요.

“허허, 그런 일이 있었나요. 용케 잘 보셨군요. 맞습니다. 지금도 수박을 먹을 때면 하얀 껍질 부분이 나올 때까지 갉아먹습니다. 이유요? 근검절약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지요. 저도 한때 돈을 펑펑 쓰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 옛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우리 골프장 캐디들과 구내식당에서 비빔밥을 먹었는데 캐디 아가씨들이 밥을 남기더군요. 그 자리에서 캐디들이 남긴 밥을 삭삭 긁어 모아 다 먹어 치웠습니다. 우리 회사가 고속도로 휴게소 사업도 하는데 직원들이 꽃게 반찬을 입에도 대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리더군요. 그 자리에서 쓰레기통을 뒤져 꽃게를 발라 먹었습니다. 그 이후론 우리 직원들은 절대 음식을 남기지 않습니다. 저희 회사 구내식당엔 그래서 잔반 처리시설이 없습니다.”

-명문 골프장 회장이자 1년 매출이 5000억원을 넘는 그룹 총수의 행동치곤 지나친 것 아닙니까.

“지나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맨주먹으로 서울에 올라온 이후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입시학원에서 기도를 보기도 했고, 공사장 막노동에 신문배달·껌팔이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오퍼상을 차린 뒤 무역에 눈을 뜨면서 꽤 큰돈을 벌었지요. 20대 후반에 벌써 저는 기사 딸린 자가용을 탔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무척 잘나갔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부유층이나 즐길 수 있었던 스키를 탔고, 틈날 때마다 스킨스쿠버도 했답니다. 아마 제가 우리나라에서 스킨스쿠버 동호인 1호쯤 될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회사가 쫄딱 망하면서 제 삶과 인생관이 바뀌었습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20대 후반엔 정말 보이는 게 없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오렌지족의 원조였던 셈인데 사업이 쫄딱 망하고 보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더군요. 집을 팔고 단칸방으로 쫓겨났고, 아이들을 고향집과 처가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때 저는 이를 악물고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근검절약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절대 남의 돈은 빌려 쓰지 않겠다’ 뭐 이런 결심을 한 거지요. 지난해 시중 건설사가 줄줄이 무너졌는데도 우리 회사(대보건설)가 버텨낼 수 있었던 건 부채가 없었던 덕분이기도 합니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황금알을 낳는 사업처럼 보입니다. 휴게소 사업권을 많이 따낸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관계 기관은 공정한 심사를 거쳐 고속도로 휴게소 사업자를 선정합니다.저희가 휴게소 사업을 많이 하는 데 다른 비결은 없습니다. 굳이 비결이라고 한다면 화장실을 깨끗이 하고, 친절하게 손님을 맞고, 음식을 맛있게 만들자는 세 가지 원칙에 충실하려고 노력합니다. 휴게소 사업을 처음 시작했던 당시엔 제가 화장실을 돌면서 손으로 변기를 닦아내기도 했습니다. 제 손으로 직접 변기를 점검하면서 휴게소 화장실을 깨끗하게 변모시켰다고 자부합니다. 언젠가 도로공사 간부가 “당신네 휴게소 화장실에서 밥이나 먹자”고 그러더군요. 그제서야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런 분이 골프장 사업을 하시다니 어울리지 않는 것 아닙니까.

“골프장 사업이 화려해 보이지만 사치와는 거리가 멉니다. 골프가 한때 부유층의 전유물처럼 비치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은 30대 직장인들도 골프를 즐기잖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골프를 즐길 시간이 많지 않지만 골프 자체를 백안시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아, 저는 우리 아들이라 할지라도 주말엔 (우리 골프장에) 부킹을 안 해 줘요.”

-골프장에서 가수들이 공연하는 그린 콘서트가 벌써 10년이 됐군요. 골프장에서 콘서트를 여는 이유가 뭔가요.

“저는 골프장의 푸른 잔디를 골퍼들만이 아닌 보통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특히 어린애들이 와서 잔디밭에서 뛰노는 걸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 없어요. 그렇다 보니 해마다 그린 콘서트를 열게 된 거지요. 첫해인 2000년만 해도 콘서트를 보러 오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3만 명 가까운 인파가 콘서트를 보기 위해 몰려들어요. 자진해 출연하고 싶다며 찾아오는 가수도 있어요. 정말 생각도 못했던 일이지요.”

-골프장에서 콘서트를 열면 잔디가 망가지진 않나요.

“생각보다 안 망가지던걸요(웃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저는 아이들이 잔디 위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요. 이날 하루만큼은 골퍼뿐만 아니라 남녀노소가 잔디를 마음껏 밟고 뛰놀게 하는 거지요. 우리가 언제 잔디를 마음껏 밟아봤나요. 대부분 학창 시절에 ‘잔디를 밟지 마시오’란 팻말을 보면서 컸잖아요.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잔디만 보면 밟는 게 아니라 피해 다녀요. 그래서 잔디밭을 열어줘도 처음엔 대부분 쭈뼛쭈뼛해요. 지난해엔 주차공간이 없기에 아예 퍼블릭 코스의 페어웨이에 차를 대도록 했지요. 직원들이 잔디 망가진다고 말렸지만 뭐 그렇게 큰 피해는 없었어요.”

-그린 콘서트를 앞으로도 계속 열 생각입니까.

“물론이지요. 이제 10년 됐는데 앞으로 우리 골프장의 특화 상품으로 키워내고 싶어요. 주말에 골프장 문 닫으면 영업 손실이 이것저것 합쳐 5억원 가까이 되는데 그래도 계속할 겁니다. 이제는 우리 직원들도 그린 콘서트를 기다려요. 행사를 준비하고, 음식을 만들어 팔고, 교통정리도 해야 하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우리 직원들은 이제 해마다 그린 콘서트를 기다린답니다.”

올해로 10년째를 맞는 그린 콘서트는 29일 경기도 파주 서원밸리 골프장에서 열린다. 오후 2시30분부터 장타, 어프로치, 퍼팅 대회 등이 이어지고 벙커에서는 씨름대회도 벌어진다. 어둠이 깔리는 오후 7시부터는 클래지콰이, 씨엔블루, 리쌍, 변진섭 등이 출연하는 공연이 시작된다. 선착순 무료 입장.

글=정제원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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