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초심으로 돌아가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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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어제로 단식 4일째. 좁은 인도에 진을 친 농성장엔 플래카드 몇 개를 벽에 걸거나 세워 놓았다. ‘참교육을 지키겠습니다’ ‘교육대학살 중단’ 같은 글귀들이었다. 정 위원장은 오전 8시에 이곳으로 ‘출근’해 오후 6시 ‘퇴근’한다고 했다. 저녁엔 인근 조계사에 마련된 천막에 들어가 전교조 동료들과 함께 밤을 보낸다. 단식은 교육과학기술부가 민주노동당에 가입한 현직교사 130여 명을 직위해제하기로 한 방침에 항의하는 뜻에서다. 학생들의 수업결손 우려 등 논란이 일자 교육부는 직위해제 시기를 일단 여름방학 뒤로 미루기로 한 상태다. 2008년 12월 제14대 전교조 위원장에 당선된 정씨는 이번이 재임 중 네 번째 단식이다. 단식 후유증으로 어금니 두 개를 잃었다고 했다.

“내일(28일)이 전교조 창립 21주년인데 기념식은 합니까.” “안 합니다. 이런 판국에 무슨 기념식이 되겠어요.” “정치투쟁 말고요, 집에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학생들의 배울 기회가 크게 차이 나는 현실을 어떻게 개선할지 등의 정책 이슈를 많이 연구해 내놓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런 연구 안 하는 게 아닙니다. 많이 하고 있는데 그런 활동에는 주목을 거의 안 하네요. 답답합니다.” “일제고사(학력평가)도 무조건 반대할 게 아니라, 어려운 아이들도 더 잘 가르쳐 일제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받게 할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연구도 많이 하고 있고 실적도 많습니다. 자꾸 다른 것만 부각돼서 그렇지….”

‘참교육’이라는 전교조 본래의 기치(旗幟)를 가리는 ‘다른 것’이란 무엇일까. 정 위원장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정치 편향’ 탓이 가장 크다. 대표적으로 계기수업을 예로 들어보자. 그동안 전교조 교사들이 벌인 계기수업의 주제는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노동절, 총선, 아·태경제협력체(APEC) 회의, 촛불시위, 6·15 남북공동성명 등, 하나같이 무엇을 노리는 계기수업인지 빤한 것들이었다. 천안함 사건이나 북한의 핵 위협 같은 것은 아예 계기수업감으로 거론하지도 않으니 학부모들이 전교조에 대해 의아함을 넘어 위험시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어느 부모가 자기 아이를 외눈박이 편향된 관점에 물들게 하고 싶겠는가.

나는 전교조가 창립한 1989년 5월 28일 이후의 상황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수만 명의 교사들이 전교조 탈퇴각서를 강요받고, 거부하면 징계위에 회부돼 교단에서 쫓겨나던 그해 여름을 기억한다. 서울시교위(지금의 서울교육청) 담당 기자이던 그즈음 시교위에서 열린 징계위에서 막 해직 통보를 받고 나온 대학 동기와 마주쳤었다. 행정고시를 거쳐 시교위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하던 또 다른 대학 동기를 불러내 셋이서 낮술을 많이도 퍼마셨다. 마신 술의 절반은 눈물이었던 것 같다.

전교조가 정치이념에 따라 몇 개 그룹으로 나뉘어 복닥대는 것은 다들 안다. 못 말리는 ‘주사파’들이 끼어 있는 것도 안다. 그래도 나는 전교조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 전교조를 꺼리는 이들도 ‘말죽거리 잔혹사’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1970년대식 교육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창립 21주년을 축하하며, 이제 정 위원장의 질문에 답한다. “맞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세요.”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