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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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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영국 국빈(國賓) 방문 한번 하는 게 여러 나라 국가원수의 꿈이랍니다. 저는 격식을 잘 몰라, 이게 그렇게 대단한 줄 몰랐습니다."

영국을 국빈 방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1일 동포간담회에서 밝힌 소감이다. 기마 근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황금마차를 타고 버킹엄궁에 들어가 시종들의 수발을 받으며 만찬을 하고 왕궁에서 잠드는…. 그 격식이 화려하다.

기회가 매우 드문 것도 사실이다. 매년 두 나라만 초대하기 때문이다. 영국과 가장 가까운 세계 최강 미국의 경우도 1918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을 끝내고 초대받은 게 처음이며, 이후 85년이 지난 2003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두번째다. 엄선하다 보니 까다롭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경우 토니 블레어 총리가 강력히 추천했지만 르윈스키 스캔들 때문에 심사에서 탈락했다.

영국의 입헌군주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전형이다. 1688년 명예혁명 이래의 불문율이 '국왕은 내각의 권고에 따른다'이다. 여왕이 매년 11월 의회에서 읽는 교서는 총리실에서 만들어준 내용 그대로다. 의회에서 통과된 법안은 자동 승인된다. 왕실에서 주는 귀족 작위도 사실은 내각에서 만들어준 명단에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격식의 화려함을 털어놓고 보는 사람은 영국 왕실을 '쇼 비즈니스', 왕족의 직업을 '테이프 커팅'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외교적으로는 의전용, 상업적으로는 관광용, 국내적으로는 가십용이란 의미다.

국빈 방문의 초청자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끄는 왕실은 윈저(Windsor)가문이다. 원래는 '작센 코부르크-고타'라는 긴 이름의 독일계 왕족이었다. 1917년 1차 대전 당시 영국인들 사이에 독일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자 영국식 이름인 윈저로 바꿨다. 런던 서쪽 작은 마을에 있는 윈저성이 왕실의 본가인 셈이다. 1953년 즉위해 반백년을 재위해온 여왕(78)은 의전의 달인이다. 여왕의 부군으로 독일계 그리스 귀족인 에든버러 공작, 56세의 찰스 왕세자 등 왕족들도 못지않게 노련하다. 이들은 각종 자선단체와 자국 기업의 이익을 위해 세계를 뛰는 고급 로비스트이기도 하다. 그래서 온갖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왕실에 대한 영국인들의 지지율은 대개 70%를 전후한 정도로 높다.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