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김종길 '상가(喪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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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주인(主人)의 모습만이 보이지 않았다.

우정 이웃 나들이라도 갈 만한

비 개인 봄 밤의 안개와 어둠,

대문(大門)은 몇 그루 꽃나무가 지키고 있었다.

마루에선 손님들만이

주인(主人) 없는 술상을 둘러 앉아

한가롭게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나들일 간 주인(主人)을 기다리듯이

손님들끼리 제법 흥겨웁게

서로 잔을 권하기도 하고 있었다.

-김종길(1926~),'상가(喪家)'

아주 점잖고 절망적인 무성영화 같은 이 상가에서는 모든 것이 과거시제. 현재는 없다. 모든 죽음은 과거다. 끝없이 계속되는 과거다. 그래서 현재 속에 갇힌 우리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 속으로 출타한 주인을 무작정 기다린다.

우리들 스스로 과거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일회용 그릇에 담아 내온 뻘건 육개장에 밥을 말거나 납작하게 눌러 반듯반듯하게 썬 돼지머리고기와 식은 생선전과 오징어포와 땅콩, 혹은 빨간 새알 토마토를 안주로 소주를 마신다. 제법 흥겨웁게(왜 상가의 음식은 언제나 똑같을까?).

김화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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