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2001] 승패를 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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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 즐거움

◇ 박세리.김미현 브리티시여자오픈골프 석권=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 6일.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에서 활약 중인 박세리(24.삼성전자)와 김미현(24.KTF)이 브리티시 오픈에서 나란히 1,2위를 차지하며 지름 4.27㎝의 골프공 위에 지구를 올려 놓았다.

LPGA 무대에서 한국 선수들이 우승과 준우승을 싹쓸이 한 것은 처음이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쾌거였다. 펄신(34)이 공동 17위, 박희정(21)은 공동 25위에 올랐다. 한국 선수들이 독무대를 이루자 이들의 훈련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갖는 등 골프계는 한동안 '코리아 신드롬'에 휩싸였다.

◇ 이봉주 보스턴마라톤 월계관=지난 4월 17일 새벽 보스턴에서 낭보가 날아들었다.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가 세계 최고 역사를 자랑하는 제105회 보스턴마라톤에서 2시간9분43초의 기록으로 우승했다는 소식이었다. 서윤복(51회).함귀용(54회)우승에 이어 50년 만의 쾌거였다. 병상에 누워 있던 부친을 여읜 지 불과 두달 만에 일군 값진 승리였다.

부친을 잃은 충격과 고통을 고된 훈련으로 극복, 영전에 환한 금빛 트로피를 바친 것이다. 국내 육상계에서는 이봉주의 성실성과 끈기를 더 높이 친다. 2시간7분20초의 한국 최고기록도 이봉주가 지난해 도쿄마라톤에서 작성했다. 그래서 '국민 마라토너'란 찬사가 붙여졌다.

◇ 뚝심의 두산 한국시리즈 우승=김응룡 감독에게 한국시리즈 첫패배라는 멍에를 안긴 두산 베어스.

우승의 원동력이었던 '뚝심과 믿음'은 올해 프로야구에 새로운 화두(話頭)로 등장했다.

두산은 정수근.홍성흔 등 끼가 넘치는 재간둥이와 조계현.최훈재 등 노장선수, 지난해 현대에서 팀을 옮겨온 심재학 등 저마다 개성이 독특한 선수들의 조합이었으나 '믿는 야구'의 대명사 김인식 감독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상승효과를 발휘했다.

시즌 초부터 부상 선수가 속출했고 10승 투수가 한명도 없었으나 주전과 백업요원 구분없이 전원이 제몫을 다하는 역할 분담으로 빈틈을 메웠다. 끈끈한 팀워크는 올해 정규시즌에서 역전승만 26차례나 일궈낸 뒷심의 원동력이었다.

◇ 급성장하는 여자축구=한국 여자축구는 8월 토토컵 대회에서 우승하며 기량이 급성장하고 있음을 과시했다. 한국은 1999년 미국 여자월드컵에서 2.3위를 차지한 중국과 브라질을 상대로 일권낸 우승이어서 값지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지막 경기는 역대 전적 9전9패로 한국의 절대 열세가 예상됐던 중국전. 한국은 전반 19분 중국 송샤오리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고 역공에 나서 전반 26분 이지은이 동점골을, 후반 2분 곽미희가 역전골을 각각 성공시켰다. 붉은 악마를 포함한 관중들의 함성은 여름밤의 폭우를 갈랐고, 후반 21분 곽미희가 쐐기포를 터뜨려 한국의 우승을 확정지었다.

◇ 월드시리즈 홈런 세방에 주저앉은 김병현=그 순간 그는 좌절의 끝을 보았을까.

지난 11월 2일, 3일.지구촌의 이목이 집중된 월드시리즈 4.5차전에서 연속 홈런을 내주며 끝내 양키스타디움 마운드에 주저 앉았던 김병현(22.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어느 미국 언론의 표현처럼 그는 그 때 지구상에서 가장 외로운 남자였다. 모두가 믿기 힘든 동점 홈런과 역전 홈런, 그리고 이튿날의 동점 홈런이었다. 그 동점 홈런 두방은 모두 '마지막 순간'으로 여겨지는 9회 말 투아웃에 터져나와 그의 좌절을 더욱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그러나 주저앉아 있는 그를 감싸안고 일으켜 세운 동료들은 결국 6차전을 이겨 승부를 7차전으로 몰고갔고 최종 7차전에서 1-2로 뒤지던 9회 말 뉴욕 양키스의 철벽 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를 상대로 기적적인 역전승을 거뒀다.1백년 월드시리즈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감동적인 명승부였다는 평가다.

그 감동의 한 가운데서 좌절의 고비를 넘긴 김병현은 "동료들 얼굴을 못보는 줄 알았다.졌더라면 나 때문에 진 것 아니겠느냐"란 말로 한숨과 함께 우승의 감격을 대신했다. 김병현은 아시아인 최초로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낀 선수로 기록됐다.

*** 아쉬움

◇ 추락 거듭한 여자 농구.핸드볼=한국여자농구가 지난 10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19회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ABC)에서 졸전끝에 사상 처음으로 결승에도 진출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1997,99년 ABC 2연패와 지난해 시드니올림픽 4강에 빛나는 여자농구가 중국.대만.일본에 잇따라 패하며 결승 진출이 좌절됐다.

예선 첫 경기에서 일본을 80-73으로 누른 한국은 중국에 64-1백으로 크게 패하고 대만에마저 68-72로 역전패해 2승2패로 준결승에 올랐다.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는 76-93으로 크게 지는 수모를 당했다. 한국은 3.4위전에서 대만에 78-63으로 승리, 쑥스러운 3위에 머물렀다. 세대교체를 준비하지 못하고 주전들이 부상으로 빠진 공백을 메우지 못한 참담한 결과였다.

88년 서울.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2회 연속 금메달을 따내며 '효자 종목'으로 각광받던 여자 핸드볼도 올해 쇠락의 길을 걸었다.동생뻘인 주니어 선수들은 지난 8월 헝가리 주니어세계선수권대회에서 8강 문턱에서 주저앉으며 9위에 그쳤다.

12월 이탈리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대표팀이 8강에서 노르웨이에 고배를 마시며 중하위권으로 처져 '2류국'으로 전락했다. 문제는 유망선수 부족으로 핸드볼의 미래가 결코 밝지 않다는 데 있다.

◇ 김운용 대한체육회장의 추락=30년 아성(牙城)이 무너지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김운용 대한체육회장에게 2001년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한해였다.국내외에서 동시에 시련을 당하며 체육계 수장으로서의 명성이 추락했다.

지난 7월 아시아인 최초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에 도전장을 내밀며 차기 IOC위원장이 유력했을때만 해도 김회장은 '거물'이었다. 그러나 '안티 아시아'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김회장은 궁지로 몰렸고 결국 자크 로게(벨기에)에게 고배를 들고 말았다.

국내에선 그의 기반인 태권도계가 시끄러웠다. 지난 4월 국가대표 선발전부터 시작된 편파판정 시비는 1년 내내 부담으로 작용했고 '범태권도 바로세우기 운동연합'이 꾸려지며 비난의 화살은 김회장에게 쏟아졌다.

김회장은 11월 15일 세계태권도연맹 총재자리를 제외한 대한태권도협회장과 국기원장 자리를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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