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신노년세대의 고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아역배우 매킨리 컬킨을 단숨에 세계적 대스타로 만들어 버린 영화 '나홀로 집에Ⅰ'에는 가족과 유리된 채 홀로 살아가는 이웃집 할아버지가 나온다. 커다란 체구에 근엄한 얼굴을 한 이 할아버지는 장난꾸러기 캐빈 형제들도 벌벌 떨게 해 '악마'로 통한다.

그렇지만 무시무시한 것은 겉모양일 뿐 속내는 손녀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평범한 할아버지다. 성가대에서 노래 부르는 손녀의 모습을 훔쳐보는 것으로 보고픈 마음을 달래는 할아버지. 그러나 불화로 갈라선 아들에게 먼저 화해를 청하기엔 그가 살아온 세월이 용납하지 않는다.

*** 갑자기 손자들 보고싶어…

영화가 선을 보인 당시만 해도 영화 속의 할아버지는 미국 가정에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굳이 자식과 불화하여 발길을 끊지 않았더라도 가족의 따스한 만남에 갈증을 느끼는 새로운 노년세대가 우리 주변에도 적지 않은 듯하다.

일전 한 모임에서 30여년을 교단에 바쳐오다 정년을 하게 된 노교수를 만났다. 그는 은퇴 이후의 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다가 "너희가 60대 남자의 고독을 알까"하고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60대 남자의 고독이라-. 나는 속으로 그들의 삶을 더듬어 보았다. 오늘의 60대 남성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보릿고개를 넘으며 교육을 받아 고속성장의 가도를 쉴 새 없이 달려왔다. 젊은 날 이들에게 '홈 스위트 홈'은 사치였다.

시대는 그들에게 일터를 인생의 전부로 삼도록 몰아붙였다. 처절한 생존의 논리였다. 그러나 그들이 일터에 매달려 있는 동안 야속하게도 사회와 가정은 변해버렸다.

"60대 남자를 가장 외롭게 하는 것은 가정에서의 역할이 없다는 것"이라고 노교수는 말했다. 집안의 어른 노릇은 차치하고라도 심지어 할아버지의 턱수염을 매만지는 손자를 야단칠 기회조차 자주 주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고작 두명 안팎의 자녀를 둔 그들은 자식들이 결혼하면 분가하거나 나이가 들어도 독신을 즐겨 손자 기근에 시달리는 신세가 된 까닭이다.

네댓명은 족히 되는 형제들과 대가족 제도 아래에서 북적대며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철이 들어서는 바쁜 사회생활로 세월도 잊은 채 지내오던 이들이 들어선 가정은 너무나 허허롭다.

'마지막 정년세대'로 사회의 안정을 만끽했던 만큼 낯선 가정 생활이 가져오는 불안감은 너무나 커 감당해내기가 쉽지 않다.그 간격을 그나마 메워줄 손자들의 발걸음조차 잦지 않은 쓸쓸함. "갑자기 약속을 파기하자는 연락이 오면 십중팔구 그 집에 손자가 온다는 뜻"이라는 노교수의 말은 '보고 싶다'는 말보다 더 간절하게 다가왔다.

더욱이 갑자기 초라해진 주머니 사정으로 모임에 발길을 끊어 '사회적 자살'을 감행하고도 모자라 끝내 경조사마저 멀리해야 하는 60대 남성들의 쓸쓸함이라니-. 가정의 변화를 역설하면서도 지금껏 신노년세대-특히 남성들이 겪는 갈등과 혼란에 대해 무심했음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여성학자 박혜란씨는 『나이듦에 대하여』란 책에서 "'나는 나다'며 넘쳐나던 자신감은 어느새 '남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고 변화에 대한 두려움은 날이 갈수록 커진다"고 고백했다.

*** 경조사까지 멀리 하기도

관용보다는 편협함에 더 익숙해지는 인생의 황혼기에서 종래의 노년들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강요받으며 신노년세대 남성들은 한걸음 한걸음 고독의 심연으로 빠져들고 있다.

세밑이다. 이런저런 망년 모임들이 줄을 잇고 있다. 몸이 열개라도 모자란다는 젊은이들의 틈에서 사회에 '사망신고'를 내고 새롭게 가정에 '출생신고'를 한 60대 남성들의 세밑은 더욱 쓸쓸하다.

저물어 가는 12월, 차마 '보고 싶다'고 말하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온 가족이 오순도순 한데 모이는 시간을 한번쯤 가져보면 좋겠다. 그들이 올 한 해를 행복한 해로 기억할 수 있도록.

홍은희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