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문화 읽기] 가족사진 앞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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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0면

거리를 걷다 어느 사진관 앞에 나란히 전시된 가족 사진을 본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중심이 되고 아들 딸이 에워싸듯 서있거나 아이들이 앞 쪽에 있는 사진들.

기본적인 틀은 과거의 가족 사진과 크게 다름이 없지만 표정들은 밝아졌고 카메라 앞에서 갖게 마련인 긴장은 많이 사라졌다. 오래 전의 가족 사진들,특히 사진이 막 알려진 초창기 가족 사진의 뻣뻣한 분위기에 비하면 모두들 카메라에 익숙해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스스로를 연출할 수 있게 된 것이라.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가족 사진들이 갖고 있는 스테레오타입적인 성격이다. 가족들이 서로 피붙이라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 가깝게 몰려 가족 내부의 위계질서를 보이는 풍경. 그 스테레오타입은 가족에 대한 일반적인 이념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화목함, 밝음, 아무 걱정 없는 행복한 가족. 결국 가족 사진은 우리 가족은 대단히 무사 행복하다는 것을 시각화하기 위한 장치이거나 증명이다. 물론 그 증명이 늘 진실인 것은 아니다. 대개의 가족들은 사진 속에서처럼 행복하지는 않을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길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보게 된 사진 속의 가족들이 불행하다든가, 사진이 위장이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가족 사진이라는 것은 어떤 가족이 됐든 찍는 순간 이미 가족 이데올로기 혹은 가족에 대한 이상적인 관념을 표현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사진관은 이 스테레오 타입의 가족 사진을 길거리에 전시하면서 그것들을 자꾸 예술 속으로 끌어넣으려 한다. 거기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기호가 바로 금박 액자와 사진을 올려놓은 이젤이다.

서양식 금박 액자는 그림을 보호하거나 돋보이게 하는 단순한 기능을 가진 것만은 아니다. 그림을 액자 속에 끼워 넣음으로써 현실과 분리돼 있다는 것, 즉 액자 속의 세계가 현실과는 전혀 다른 가상 세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이다.

그리고 장식적 조각과 금박으로 인해 그 점은 더욱 강화된다. 이젤 또한 마찬가지다. 캔버스나 화판을 올려놓고 그림을 그린다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벗어나 예술, 아틀리에 등을 떠올리게하는 기호 노릇을 한다.

그러니까 사진관 앞에 전시된 가족 사진들은 그 포즈와 표정과 기타 장치들에 의해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전시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진이란 아무리 그럴듯해도 찍히는 순간 일단 허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족 사진이란 그 허구성에 의해 오늘날 우리의 가족 현실을 증명하는 거울 노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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