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공약 (空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남의 약속을 어리석으리만치 고지식하게 믿는 경우를 일컬어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 한다.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 미생이 애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약속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계속 기다리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면서 개울물이 불어났다. 그래도 다리 밑을 떠나지 않다가 교각을 끌어안은 채 익사했다는 이야기다.

명나라 사람 풍몽룡(馮夢龍.1575~1646)이 엮은 단편소설집 『유세명언(喩世明言)』에는 좀더 섬뜩한 고사가 등장한다.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범거경(范巨卿)이라는 젊은이가 도중에 동상에 걸려 다 죽게 됐다.

역시 과거를 보러 가던 장려(張勵)라는 젊은이가 그를 발견하고 며칠 동안 정성껏 돌봐주었다. 두 사람 모두 시험 날짜는 놓치고 말았지만, 대신 의형제를 맺었다. 둘은 다음해 중양절(음력 9월9일)에 장려의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해가 바뀌어 약속한 날이 되자 장려는 음식을 장만해 놓고 범거경을 기다렸다. 날이 저물도록 손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윽고 깊은 밤, 초췌한 몰골에 수심 가득한 표정의 범거경이 기척도 없이 장려의 방에 들어섰다.

그는 산 사람이 아니라 범거경의 귀신이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범거경은 중양절 당일에야 뒤늦게 약속을 기억해냈지만 천리길을 가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어쩔 줄 몰라 하다 "귀신은 천리길도 단숨에 갈 수 있다"는 주변의 말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약속을 지켰다는 것이다.

비록 융통성과는 담을 쌓았더라도 약속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옛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감동과 교훈을 준다. 현실이 그 반만도 못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선거가 일년도 더 남았는데 벌써부터 "다음 대통령감은 나밖에 없다"는 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제 유종근 전북지사가 기자회견을 열고 공약을 발표함으로써 민주당에서만 모두 여덟명이 대통령 꿈을 꾸게 됐다. 자민련 김종필 총재도 사실상 출마를 선언했고, 한나라당엔 이회창 총재가 있다.

저마다 무지갯빛 약속을 내걸고 있지만 많은 이들은 여전히 냉소적이다. 한두번 속아본 우리 국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자기가 말하는 것을 결코 믿지 않기 때문에 남이 자기 말을 믿으면 놀란다"고 드골은 빈정거렸다. 일찍이 흐루시초프도 "정치인은 다 같다. 그들은 강이 없는 곳에도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한다"고 말했다던가.

노재현 정치부 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