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관령의 중공군 (96) 박정희와 김형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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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6·25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가운데)이 미군사령부에서 매슈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오른쪽)을 만난 뒤 함께 나오고 있다. 왼쪽에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이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다. 리지웨이 장군은 1950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8군 사령관을 지냈다. [미 육군부 자료]

국군 6사단이 강원도 화천군 사창리에서 맥없이 물러날 무렵에 이승만 대통령은 곤경을 치러야 했다. 제대로 실력을 겨루지도 못한 채 물러난 경우가 적지 않았던 국군 때문이었다.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과 제임스 밴플리트 신임 미 8군 사령관은 그 당시 부산에 있던 임시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갔다.

“대통령 각하, 이게 무슨 군대란 말입니까?” 나중에 들었던 이야기는 심각했다. 리지웨이 장군과 밴플리트 사령관은 이렇게 늙은 이 대통령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태도로 심하게 따져 물었다고 한다. 대통령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중공군에게 밀려 내려오면서도 북진통일을 향한 꿈을 결코 접는 법이 없었다. 이 대통령은 그 무렵 미군 최고 지휘관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우리에게는 100만의 청년이 있다. 대한민국 청년들을 무장만 해 준다면 미군은 필요 없다”고 자신 있게 주장하곤 했다.

그런 이승만 대통령에게 미군 최고 지휘관인 리지웨이와 밴플리트가 찾아가 “대한민국 국군이 정말 군대 맞느냐”라는 식으로 심하게 힐난했을 때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그런 말을 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일선 국군 지휘관들의 심정 또한 편했을 리 없다.

자신감과 함께 전쟁에 적응해 가는 국군의 모습이 뚜렷했지만 전쟁 경험이 많은 중공군에게 또 밀린다면 국군으로서는 갈 데가 없었다. 그런 점이 가장 우려스러웠다. 중공군은 국군이 점차 전투력을 갖춰가는 시점에서도 국군이 지키고 있는 전선만을 공격하는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화력 면에서 격차를 드러내는 국군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상대하기 한결 편했던 것이다.

일선을 지휘하는 국군 지휘관은 1951년 중공군의 춘계 공세에 직면하면서 그런 심사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한 중공군은 주력을 우회시켜 동부전선으로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서부전선의 중공군은 전선의 유지만을 꾀했다. 강력한 화력으로 무장한 미군과 기타 연합군의 이동을 방지하기 위해 서부전선에선 공격하는 시늉만 낸 측면도 있다. 대신 강력한 공격력을 보유한 병력을 돌려 동부전선을 때리기 시작한 것이다.

박정희(1917~79)

나는 그 시점에 분주하게 1군단 방어지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설악산 근처 어딘가였다. 수도사단 예하의 한 부대를 시찰하고 있었다. 현지의 방어 책임을 지고 있는 중대장 한 사람이 내게 부대 현황에 관한 브리핑을 했다. 당차고 똘똘해 보였다. 단단한 차돌멩이 같다는 인상을 주는 대위였다. 이름은 김형욱. 그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5·16에 가담해 60년대 중앙정보부장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브리핑을 썩 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달하려는 말의 요점이 분명했고, ‘일을 잘할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인물이었다. 그는 일사천리로 부대 현황에 대해 설명을 했다. 지휘관의 입장에서 보면 김형욱은 일단 호감을 주는 인물이었다.

김형욱(1925~79?)

그의 고향은 황해도였다. 이승만 대통령과 같았다. 그 황해도 출신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출생 지역으로 개성을 설명하는 것은 무리지만 황해도 출신들은 호오(好惡)가 분명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좋고 싫음이 아주 분명한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모험적인 인간관계를 설정하는 경우도 있다. 김형욱의 대인관계도 그랬던 것 같다.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면서 막후의 실력자로 극단적인 행동을 했으니 말이다. 그의 말로는 좋지 않았다. 지금도 그의 사망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불꽃 같은 충성을 보이다가 버림을 받았던 점도 그렇다.

그러나 당시의 김형욱 대위는 어쨌거나 전쟁터에 나와 있었다. 우리 1군단의 방어지역으로부터 서쪽에는 국군 3군단이 지키고 있었다. 그곳에는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9사단과 3사단이 배치돼 있었다. 그 9사단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령 계급장을 달고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훗날 본 그는 심사숙고의 전략가 스타일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령이 속한 9사단의 부사단장으로서는 전쟁 발발 뒤 서울에서 저항작전을 펼치려고 했던 것으로 유명한 이용문 대령이 있었다. 나중에 알려지는 사실이지만, 박 전 대통령과 이용문 장군은 특별한 사이다. 함께 대한민국의 변혁을 꿈꿨던 인물이다.

박 대통령은 5·16 성공으로 18년간 권좌에 올라 대한민국의 산업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이용문 장군은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전쟁 중에 숨졌다. 김형욱은 수도사단 중대장으로 활약하다 나중에 박 대통령 밑에서 권력의 핵심인 중앙정보부장을 맡았다.

그것은 다 시간이 흐른 뒤에 그들이 맞은 영고성쇠(榮枯盛衰)다. 그들이 간직하고 태어난 운명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 자신의 역사적 조우(遭遇)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뉜다. 그러나 당시에는 우리 모두 전선을 지키는 군인이었다. 약한 군대, 국군만을 치고 들어오는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던 평범한 대한민국 군인이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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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대한민국 대통령(제5.6.7.8.9대)   *사망

19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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