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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시위대 “협상하자” … 정부 “해산 먼저” … 군부 “진압 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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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실갱이 끝에 그린존에서만 취재하기로 허가를 받고 미국ㆍ스페인ㆍ일본대사관이 밀집된 위타유로(路)에 들어섰다. 평소에는 수려한 경관과 고급 호텔이 많아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이곳은 적막하다 못해 황량한 분위기였다.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호주 펄스에서 온 수잔 헬겔랜드는“기온은 한증막처럼 더운데 분위기는 겨울이 시작된 호주의 요즘처럼 을씨년스럽다”고 말했다.

M-16 소총 등으로 무장한 태국 시위 진압군(왼쪽)에 맞서 반정부 시위대는 다양한 방법으로 대항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들 왼쪽부터 돌멩이, 불 붙인 타이어, 사제 권총, 화염병, 새총. [방콕 AP·로이터=연합뉴스]

17일 새벽 폭발음과 총성으로 호텔 투숙객이 대피 소동을 벌였던 그린존 남쪽 살라댕 거리는 상점들이 모두 철시해 적막만이 흘렀다. 불꺼진 스타벅스 체인점 문 앞에는 며칠째 걷어가지 않은 신문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가끔 개 짖는 소리만 들렸다.

관광 도시 방콕이 활력을 잃고 있지만 6일째 이어진 태국의 유혈사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18일 반정부 시위대(UDDㆍ일명 ‘레드 셔츠’)는 정부와의 협상 테이블에 나서겠다며 적극적이었지만 정부는 선(先) 해산을 조건을 내걸어 모처럼의 협상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이날 오전 총성이 멎었던 방콕의 도심에서는 협상 무산 이후 다시 폭발음이 울리는 등 날선 대치가 재연됐다. 일각에선 양측이 물밑 협상 채널까지 없앤 것은 아니라며 막판 극적 타결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대치→소강→대치를 거듭하는 이번 사태가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회의감이 커지고 있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하는 UDD 지도자인 나타웃 사이쿠아는 이날 오후“더 이상의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상원이 중재하는 협상에 참여키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상원은 시위대에 어떤 중재안이라도 제시할 수 있으며 시위대는 이를 검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엔이 평화적 해결을 촉구한 가운데 64명으로 이뤄진 태국 상원(정원 150명)의 최대 계파는 이날 시위대와 정부 측에 사태 해결을 위한 중재에 나서겠다는 서한을 보냈다.

이에 대해 사팃 옹농태이 총리실 장관은 “시위대가 먼저 자진 해산해야만 시위대와 협상을 재개할 수 있다”고 말해 거부의사를 명확히 했다. 하지만 정부 내에서도 강경 진압에 대한 회의론이 만만치 않아 타협 외에 뾰족한 수가 없다는 시각이 많다. 분야키앗 카라벡판 교수(람캄행대학 정치학)는“정부나 시위대도 협상만이 유혈충돌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군부 일각에선 강제 진압 반대= 정부는 17일 오후 3시(현지시간)를 시위대 해산 최후통첩 시한으로 못박았으나 하루가 지나도록 진압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군인들도 한숨 돌린 듯 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태국 현지 신문들은 “진압을 독려하는 아피싯 총리와 이에 미온적인 아누퐁 파오친다 육군 참모총장 간의 이견으로 진압작전이 난항을 겪고 있다”고 보도했다. 16일 방콕에 통행금지령을 선포하려던 계획도 아누퐁 총장의 반대로 무산됐다. 아누퐁이 강제진압을 꺼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시위대가 무장을 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시위대는 4월 시위 때 정부군으로부터 탈취한 소총ㆍ수류탄ㆍ유탄발사기 등을 보유하고 있다. 무력을 동원해 진압을 시도했다가는 본격적인 시가전으로 확산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5000여 명으로 추산되는 시위대에 섞여있는 부녀자ㆍ노약자들도 시위 현장을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어 이들이 ‘인간방패’를 자처하고 나설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을 빚을 수도 있다. 로이터 통신은“ 대규모 참사는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는 아피싯 정부의 정치 기반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재 의사를 보이고 있는 국제사회가 이번 사태의 해결 방향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최근 UDD 지도부 인사들을 만나 평화로운 해결을 당부하는 등 우회적으로 태국 정부를 압박했다. 또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도 태국에서 발생해 주변으로 확산됐다”며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정상회의를 열어 해결책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돼 있어 강제 진압에 나설 경우 국가 신인도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점도 고려할 수 밖에 없다.

최근 닷새 동안 시위대와 진압 군경 간 유혈충돌로 38명이 숨지고 270여 명이 다쳤다. 반정부 시위가 본격화된 3월 중순 이후 사망자는 67명, 부상자는 1700여 명에 달한다. 이달 초 아피싯 총리는 의회해산과 11월 조기총선 협상안을 제시했으나 시위대는 추가 요구조건을 내걸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방콕의 쇼핑 중심가인 라차프라송 거리를 점거하고 있는 시위대는 즉각적인 의회해산과 총선을 요구해왔다.

정용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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