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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 양장점은 살아있다, 패션 리더들의 사랑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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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2면

어느덧 양장점 옷은 ‘촌스러운 것’으로 전락했다. 다시 한 세대를 돌아온 지금, 비슷비슷한 기성복 디자인에 질린 젊은 스타일 리더들이 다시 양장점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옷깨나 입어 본 ‘언니’들이 “백화점보다 싼값에 ‘내 스타일’을 가질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붕괴의 와중에도 살아남은 몇몇 양장점은 새로운 르네상스 시대를 꿈꾸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도 여전히 양장점으로 살아가는 그들을 찾아가 봤다.

글=이진주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우주  강남에서 ‘먹히는’ 북유럽 스타일

얼마 전까지 지상파 방송사 시험을 한 번 보려면 수백만 원이 들었다. 수험생들은 저렴한 가격에 눈에 확 띄는 옷을 입고 싶어 했다.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었던 박소현(36··사진) 대표의 ‘우주콜렉션’은 그런 수요를 충족시키며 승승장구했다. 정장 한 벌에 30만~50만원이었다. ‘아나운서 코디네이터’ 출신이란 프리미엄도 있었다. 이화여대 앞 ‘지오콜렉션’과 양대산맥이라고 불렸다. 아나운서 아카데미 수강생들이 단체로 몰려가 옷을 맞췄다. 그런데 시장이 변했다. 방송사들이 ‘청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고 카메라 테스트를 치르기 시작한 것이다.

‘우주’의 재킷을 입고 있는 이은영씨.

‘우주콜렉션’도 변신했다. 매장 절반을 수입 의류로 채운 편집매장(셀렉트숍)이 됐다. 알록달록하고 정형화된 아나운서 정장 대신 북유럽 디자이너 ‘앤 드뮐뮈스터’ 스타일의 난해한 옷을 만들어 걸었다. 아는 이들만 알아보는 디자인에 무채색이나 톤 다운된 색를 쓴다. 요즘엔 재킷을 보고 들어온 이들이 다른 옷도 맞추고, 어울리는 수입 티셔츠도 사 간단다.

여기서 만난 두 명의 젊은 고객은 한눈에도 패션 피플이었다. 한국무용을 전공하는 이경수(35·여)씨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엄마를 따라 옷을 맞춰 입었다고 한다.

친구 이은영(36·여)씨는 재킷을 가봉했다. 이씨는 ‘랑유 김정아’라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디자이너 의상실 MD 출신이다. 재킷 25만원. 02-512-0367.

비츄리  대를 이어가는 명품 의상실

비츄리는 원래 이화여대 정문 앞길에 자리 잡았던 맞춤집이었다. 3년 전 반대편 골목의 한옥형 3층 건물로 확장 이전했다. 공대를 나온 둘째 아들 이규한(37·사진) 실장이 2대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이 실장은 에스모드 서울에서 옷을, 이탈리아 폴리모다이에서 마케팅을 배우고 돌아와 ‘가업’을 이었다. 지난해 돌아가신 아버지 이수열씨와 어머니 고영미 대표가 50년 동안 일군 곳이었다.

얌전한 사모님 스타일의 맞춤복으로 명성을 날리는 ‘비츄리’ 매장 전경.

어머니 고 대표의 옷은 이화여대 앞 양장점 중에서도 고가였다. 교수와 동문들이 주로 찾는다고 했다. 여기 단골인 탤런트 김자옥처럼 ‘곱게 나이 든 여사님’ 스타일이다. 수입 옷감을 주로 사용하고, 상류층 고객들이 원하는 튀지 않는 디테일을 넣는다. 매장을 한옥과 고가구로 꾸민 것도 그래서다.

아들의 목표는 다르다. 디자인도 좀 더 똑 떨어지고 데님 같은 젊은 소재도 과감하게 사용한다. 레이스처럼 얇은 가죽이나 스웨이드에 빨간 스티치를 박아 넣어 생동감을 주기도 한다. 그는 “‘비츄리’를 브랜드로 키우고 싶다”고 했다. 자신의 장기인 남성복 라인도 곧 시작할 계획이란다. 어머니 고객을 대상으로 한 오트 쿠튀르 라인과 젊고 날렵한 감각의 세컨드 라인, 백화점에 들어가는 기성복 라인으로 분화 방향을 잡았다. 20~30대를 타깃으로 한 세컨드 라인 가격대는 스커트 정장 한 벌에 75만원이라고 밝혔다. 02-362-9130.

지오콜렉션  아나운서들의 단골집

강선진(48·사진) 대표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국제복장학원을 다니며 옷을 배웠다. 고모가 운영하던 양장점에서 10년 동안 트레이닝을 받고, 15년 전 이화여대 뒷골목에 가게를 냈다. 90년대 황현정부터 2000년대 최윤영까지 ‘9시 뉴스’ 진행자들의 단골숍이다. 매장을 찾은 날도 MBC 이정민 앵커의 코디네이터가 협찬 의상을 고르고 있었다.

‘지오콜렉션’의 투피스.

여기 옷은 전형적인 아나운서 스타일이다. 디자이너의 의도는 아니라지만 그렇게 알고 찾아오는 지망생들이 비슷한 디자인을 변주해 달라고 요청한다. 꽃잎처럼 모서리를 둥글린 넓은 칼라가 대표적이다. 진분홍색·초록색·노란색 등 일상생활에서 입기에는 다소 과하다 싶은 색상을 사용한다. ‘조명발’을 잘 받게 하기 위해서다. 리본이나 테이핑 같은 디테일도 많이 넣는다.

“여기 옷을 입고 합격했다”는 후기가 돌면서 이화여대 앞 무수한 아나운서풍 양장점 중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강 대표는 미술을 전공하는 고3 외동딸에게 가게를 물려줄 생각이란다. 최근에는 아나운서 공채 시장이 냉각되면서 스튜어디스 지망생이 많이 온다고 한다. 신부들의 예복으로도 인기 있다. 정장 한 벌 65만원. 02-393-0733.

이광수  콜렉션 청담동 시장통의 ‘랑방’

서울 청담동 122번지의 허름한 3층 건물, ‘청담제일시장’ 202호는 양장점이다. 비좁은 작업실 한쪽에는 미싱이 놓여 있고, 그 옆엔 재단대가 있다. 동네 수선집 같은 분위기다. 그러나 이 가게는 청담동 ‘패션 피플’ 사이에선 이름난 곳이다. 유명 소녀그룹 멤버들도 다녀가고, 상류층 고객도 꽤 된다. 얼마 전엔 케이블TV에서 패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종완이 찾아와 입소문을 내줬다. 취재를 위해 찾아간 날도 거물급 웨딩드레스 디자이너가 “프랑스 출장길에 입겠다”며 맞춘 옷 일곱 벌을 한꺼번에 만들고 있었다.

이곳의 대표 이광수(40·사진)씨는 소년 시절부터 옷을 만들었다. 그의 손끝에선 명품 부럽잖은 날렵한 디자인이 나온다. 낡은 마네킹에 입혀진 남색 오블리크(한쪽 어깨를 사선으로 드러낸 스타일) 미니드레스에 눈길이 갔다. 디자이너 ‘랑방’ 같은 느낌이지만 카피는 아니다. 이름을 밝히기 어렵다는 한 멋쟁이가 주문하고 간 옷이다.

IMF를 맞고 빚에 쫓기다 시장통으로 온 것이 4년 전이다. 일부 고객이 따라왔지만 허름한 분위기 때문에

‘이광수 콜렉션’의 오블리크 미니드레스.

여기 다닌단 걸 밝히기 주저한단다. 원피스 25만원. 옷감을 가져가면 더 싸다. 02-543-0568.



해외 유명 디자이너 옷, 기성복 절반 값에 만들어주기도

양장점 매니어들이 번거로운 과정을 감수하며 맞춤옷을 입는 가장 큰 이유는 사이즈 때문이다. ▶팔다리가 긴 연예인 체형이거나 ▶특대·특소 사이즈 ▶‘상체는 44, 하체는 66’인 경우처럼 신체 균형이 맞지 않을 때, 일반 기성복이 맞을 리 없다. 옷값에 수선비까지 들여도 남의 옷처럼 테가 안 나기 마련이다. 표준 체형에 가깝더라도 얼굴에 비해 어깨가 넓다든지, 배가 나왔거나 골반이 큰 단점들을 보완하기도 쉽다.

기성복의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에 물린 패션리더들도 즐겨 찾는다.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거나 가격이 비싼 해외 디자이너의 컬렉션 사진을 가져가면, 최대한 비슷하게 맞춰주는 집도 여럿이다. 대부분의 군소 양장점이 디자이너로서의 자기 색깔보다는 고객의 요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기성복 값의 절반 수준으로 명품 디자인을 입을 수 있다. 상류층 실속파 고객들이 노리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색상·소재·디테일에 나만의 취향을 반영하는 경우도 많다. 사실상 자신이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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