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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산은 산 물은 물 연재 끝낸 원택 스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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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성철 선사의 얘기를 생생하게 들려주던 '남기고 싶은 이야기-산은 산 물은 물'의 필자 원택(圓澤)스님의 얼굴이 환해졌다. 반년 넘게 끌어온 연재를 마감해 글쓰기의 부담에서 벗어났다는 홀가분함 때문이다.

시작할 때만 해도 막연했는데, 연재를 거듭하면서 반응이 좋아 불교를 널리 알리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탰다는 뿌듯함도 적지 않다. 서울 조계사에 있는 조계종 총무원으로 스님을 찾아갔다. 원택 스님은 총무원 총무부장직을 맡고 있다.

"그저 욕 안먹고 끝낸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몸짓처럼 어눌하면서도 느릿한 경상도 악센트로 밝히는 짧은 소감. 표현은 밋밋하지만 어지간히 감정표현을 않는 원택 스님의 평소 성격으로 미뤄 상당한 기쁨의 표현으로 받아들여도 될 듯하다.

사실 유별난 선승(禪僧)이었던 스승의 삶을 신문에 낱낱이 공개한다는 것은 마음먹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지금도 헤아리기 힘든 큰스님의 뜻을 잘못 전달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이 가장 컸고, 성철 스님을 앞세우다가 다른 문중(門中)으로부터 "너희 스승만 최고냐"는 핀잔을 들을까봐 걱정스러웠다. 처음 "연재를 해보자"는 제안을 받고 고사한 것은 그런 마음의 부담 때문이었다. 그러다 "그냥 본대로만 쓴다"는 원칙을 정하고서 마음을 다잡았다.

막상 시작하자 반응은 좋았다. 그럼에도 즐겁지만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면 늘 "연재 잘 보고 있습니다"는 인사를 받으면서도 '혹시 큰스님께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연재를 보면 큰스님이 다시 살아오신 듯 반갑다"는 칭찬도 '한 치의 틀림이 없어야 한다'는 질책으로 들렸다. 연재도중 내내 성철 스님을 모시던 당시의 조심스런 마음을 잃지 않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성공리에 마쳤다"는 자평이다.

"눈높이를 잘 맞췄던 것 같습니다. 불교가 어렵다는 생각에 불교관련 글은 잘 안 읽으려고들 하는데, 이번에는 아주 쉽게 구체적인 얘기를 했더니 일반인들도 재미있게 보더군요. 큰스님도 큰스님이지만 불교적인 사고방식, 절집의 생활을 널리 알린 것이 큰 성과겠지요."

원택 스님은 '본대로만 쓴다'는 원칙에 따라 철저히 눈높이를 낮췄고, 부끄러운 실수까지도 솔직히 털어놓았다고 한다. 주위에서 "좌충우돌하는 실패담이냐"는 힐난도 있었지만 "살아있는 얘기"라는 칭찬을 더 많이 들었다.

성격이 급한 성철 스님이 격노하는 대목이 자주 나가던 무렵 일부에서 "큰스님이 아니라 괴팍한 노인 아니냐"라고 할 때는 답답하기도 했다. '봉암사 결사'대목에서 성철 스님이 법당에 놓인 무속의 흔적을 쓸어버리고 선(禪)불교의 가풍을 진작하는 대목에 이르러서 그같은 오해나 편견을 씻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본격적인 불교 철학이나 사상을 설명하지는 못했다.

"제일 아쉬운 대목이지요. 불교사상을 설명하고는 싶었지만, 그러자면 '불교 포교하느냐'는 비난이 적지 않을 터이고, 또 어렵다며 독자들도 외면했겠지요. 그래서 가능하면 성철 스님의 언행 하나하나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불교적 가르침을 담고자 했습니다. 부족하긴 했지만…."

원택 스님 자신이 수행 중 앓았던 '상기병(上氣病.참선을 하면 머리가 아픈 병)', 성철 스님이 깨달음의 과정에서 경험했던 '동정일여(動靜一如.움직이나 안움직이나 화두를 놓치지 않는 경지)''몽중일여(夢中一如.자나 깨나 화두를 놓치지 않는 경지)' 등은 모두 선불교의 기초 개념들.뒷부분에서 성철 스님의 핵심사상인 '돈오돈수(頓悟頓修.단박에 깨닫고, 단박에 닦는다)'를 설명하기 위한 용어들이다.

그러고도 정작 돈오돈수를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 힘든 세계인 탓이다. 대신 12월초에 연재내용을 재정리해 내놓을 책(가제 『성철스님 이야기』.김영사)에선 선사상에 대한 설명을 보충했다.

성철 스님이 평생 추구했던 삶의 목표, 원택 스님이 연재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가르침을 '쉽게,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을까. 당돌한 질문이라 생각했는데, 원택 스님은 큰 망설임 없이 느릿하게 말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는 것이지요."

마치 루터나 칼빈의 종교개혁이 '성경'과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이었듯, 성철 스님이 한국불교를 개혁하고자 한 취지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정신이었다는 것이다. 돈받고 불공해주는 스님을 '도둑놈'이라 꾸짖고, '남을 위해 기도하라'며 자비심을 강조하던 것들도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성철 스님은 누구보다 그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려고 했고, 또 따르기를 강조했던 분이란 결론이다.

성철 스님의 상좌 30여명 중 원택 스님은 여섯번째다. 1973년에 출가했지만 실제로 성철 스님을 가까이서 모신 것은 70년대말부터. 이전까진 앞서 출가한 사형(師兄)들이 성철 스님을 모셨고, 원택 스님은 서열에 밀려 허드렛일만 했다. 그러다 사형들이 이런 저런 사정으로 백련암을 떠나면서 원택 스님은 본격적으로 성철 스님을 모시기 시작했다.

큰스님 입적까지 20여년, 원택 스님은 대외적으로 성철 스님의 심부름꾼이자 대변인이었다. 특히 80년대 말 이후 큰스님의 법문을 출간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이었고, 그러다 보니 큰스님의 유산을 대부분 물려받았다.

성철 스님이 머물던 백련암의 감원(암자의 주지), 성철 스님 생가 자리에 건립한 겁외사의 주지, 성철 스님 사상을 알리기 위해 만든 백련불교문화재단의 이사장 등. 거기에다 2년여 전부터는 총무원 총무부장 자리를 맡아 종무행정에 바쁘다.

일부에선 총무원 보직을 맡고 있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빨리 백련암이나 겁외사로 돌아가야한다는 충고다. 원택 스님의 생각은 한 가지뿐이다.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하며 사는데, 그게 합천 산골이든 서울 도심이든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원택 스님은 그런 생각에서 연재도 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직책을 맡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매일 10장씩 원고를 써내기가 쉽지는 않았다. 큰스님의 모습을 기억해내는 과정 그 자체가 가르침을 되새기는 수행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불교계에서 손꼽히는 효상좌(孝上佐.효심이 지극한 상좌)답다.

오병상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 연재를 마치고

'산은 산, 물은 물'의 첫회는 지난 6월 1일 성철 스님이 입적하는 장면으로 시작됐다. 당일 아침부터 전화와 e-메일이 정리를 담당한 기자에게 몰려왔다. "연재를 언제까지 하느냐"는 질문이 많았고, "좀 더 길게 써달라"는 요구도 있었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이라며 "인간 성철의 면모를 보여줘 거부감이 없다"는 반응들이 많아지면서 독자층이 넓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초등학생 독자도 적지않았다. 대부분 "어머니가 너무 재미있다기에 같이 읽는다"는 소감문을 보내왔으며, 어떤 학생은 "화두가 뭐냐"고 물어온 이후 연재도중 조금 어려운 말이 나오면 수시로 메일을 보내와 담당 기자에게 불교공부를 강요하기도 했다.

경북 상주의 한 경찰관은 "돌아가신 성철 스님이 모녀상봉을 주선했다"는 내용의 감사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연재에 사용한 사진 속의 여인을 보고 한 할머니가 "잃어버린 딸"이라며 찾아와 어렵사리 딸을 수소문해 찾아주었다는 것이다.

연재내용을 책으로 출간하려는 출판사간의 경쟁도 뜨거웠다. 연재가 나간 다음날부터 출판사들의 문의가 빗발쳤는데, 저작권자인 원택 스님은 '김영사'를 선택.'김영사'가 연재내용을 두 권의 책으로 출간할 뿐 아니라, 이후 성철 스님의 법어집을 시리즈로 출간하고 다시 이를 영어로 번역해 외국에까지 판매하겠다는 의욕적인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 성철스님 어록

◇ 참선 잘 하그래이=성철 스님이 1993년 11월 4일 아침 원택 스님의 어깨에 기대어 입적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 참선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선사상을 압축한 표현이다.

◇ 나는 좋은 옷 입을 자격이 없데이=평생 누더기 옷을 기워 입던 성철 스님은 신도들이 좋은 옷을 해오면 항상 이런 말로 거절했다.

◇ 밥도둑놈아, 밥값 내놔라=참선수행을 게을리하는 스님들을 꾸짖던 호통. 수행정진 잘 하라고 신도들이 시주한 음식을 먹으면서 수행을 않으니 곧 밥 도둑이다.

◇ 절돈 삼천원 내놔라=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삼천배를 하라'며 하던 말. '절돈'이란 곧 부처님에게 절하는 것.

◇ 속이지 마라=성철 스님이 남긴 휘호 중 '불기자심(不欺自心.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과 같은 말이다. 성철 스님이 출가 전 원택 스님에게 준 좌우명이기도 하다.

◇ 중이 무신 생일이 있노=출가한 이상 세속의 생일은 의미가 없다는 가르침. 성철 스님은 그래서 생일상을 받지 않았다. 젊은 시절엔 이를 모르고 신도들이 차린 생일상을 던져버리기도 했다.

◇ 똑같다=참선의 경지를 표현하던 말. 어느 경지에 들면 자나 깨나 똑같이, 움직이나 안움직이나 똑같이,아프나 건강하나 똑같이 머리 속에서 화두가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

◇ 부귀와 영화를 원수 보듯 하라=성철 스님이 쓴 발원문 가운데 절제되고 청렴한 생활자세를 강조한 대목.

◇ 노력 없이는 아무 성공도 없데이=성철 스님이 딸인 불필(不必)스님에게 부단한 수행정진을 강조하면서 들려준 가르침.

◇ 중이 가는 길은 혼자 가는 길이다=일타 스님이 안거를 떠나는 성철 스님에게 '혼자 가느냐'고 묻자 스님이 대답한 말. 구도행각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외로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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