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대 오른 재외동포법] 중·러 동포 출입국 쉬워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헌법재판소가 29일 중국.옛소련(러시아 등 15개국) 지역 등의 동포들을 재외동포의 대상에서 제외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재외동포법)'2조2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림에 따라 이 법은 제정 2년여 만에 대폭 손질이 불가피해졌다.

이번 결정으로 이 지역 동포들의 출입국.체류.경제활동을 어느 정도 완화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이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재미.재일동포와 같은 수준으로 개방했을 경우 중국.러시아 동포들이 취업을 위해 몰려들어 국내 노동시장.치안에 엄청난 혼란이 예상된다. 따라서 개방 수위를 놓고 국회와 정부.시민단체 등 사이에 논란이 예상된다.

◇ 무엇이 문제였나=정부는 1998년 8월 김대중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따라 재외동포들에게 국내 거주 국민들과 거의 같은 권리를 부여하는 내용의 법안을 마련했다.

혈통주의에 입각해 '한민족 혈통으로 외국 시민권을 가진 동포'면 현재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갖고 있더라도 국내에서 부동산을 거래하고 의료보험.연금에 가입할 수 있게 하는 등 내국인과 같게 대우한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그러나 입법과정에서 중국 정부가 항의해옴에 따라 재외동포를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했던 자 또는 그 직계비속으로서 외국국적을 취득한 자 중 대통령령이 정하는 자'로 범위를 제한했다. 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에 해외로 나간 사람을 동포의 대상에서 제외한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동포 1백88만여명▶옛소련 52만여명▶일제 때 징용 등으로 끌려간 무국적 재일동포 15만명 등 2백55만여명은 적용 대상에서 빠졌다. 시민.종교 단체들은 이 법안이 헌법상 평등권 침해는 물론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의 취지도 외면했다며 전면 수정을 요구해왔다.

◇ 헌재 판단=헌재는 '정부 수립 이전에 외국으로 이주한 동포를 재외동포법의 적용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차별의 정도가 적정하다고 볼 수 없고, 자의적인 입법'이라고 판단했다.

헌재는 그러나 "입법권을 존중해 법률의 위헌 선언 대신 단지 법률의 위헌성만을 확인하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다"고 설명했다.

위헌 결정을 선고하면 외국 국적 동포의 경우 재외동포법이 부여하는 지위가 그 순간부터 상실돼 혼란이 우려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지위변화.문제점=입법부가 헌재가 권고한 2003년까지 이 법을 어떤 식으로 개정할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하지만 다른 지역 재외동포와의 형평성을 고려할 때 중국.러시아 동포들의 출입국 조건을 완화하고, 부분적인 경제활동을 허용하도록 관련 규정을 고칠 가능성이 크다.

이럴 경우 이들은 거소(居所)신고증(일종의 주민등록증)만 제출하고 비자를 발급받은 뒤 재외동포 자격으로 2년 동안 체류할 수 있으며, 자유롭게 체류 기간을 연장하고 재입국 허가 없이 출입국할 수 있게 된다.

취업, 부동산 취득.보유, 예금가입, 외국환거래 등 경제활동에서도 내국인과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된다. 또 90일 이상 국내에 체류하면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는 "경제난을 겪고 있는 이 지역 동포들이 한꺼번에 몰려들 경우 우리 노동시장의 교란과 실업문제 악화 등이 예상되며, 치안의 문제점도 대두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중국.러시아 동포들의 상당수가 취업을 위해 대거 입국해 불법 취업할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이다.

따라서 정부는 중국.러시아 동포들에 대해 재미.재일동포 수준까지 개방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비자 발급이나 출입국 과정에서 헌법에 위반하지 않을 정도의 제한을 둘 가능성이 크다. 이와 함께 이 지역 동포들의 불법취업 등을 철저히 단속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할 것으로 전망된다.

박재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