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균영 유작 장편소설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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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너와 나의 개인적인 애증의 삶이 현실인가, 싸움없이 두루 잘 사는 세상을 가꿔 나가는 것이 현실인가. 개인의 일상적인 삶과 공동체의 이상은 달라야만 하는 것인가.

문학은 무엇이고 역사는 무엇을 위한 탐구인가. 최근 출간된 이균영(李均永.1951~1996)의 유작 장편소설 『떠도는 것들의 영원』(문학사상사.8천원)은 문학과 역사, 개인과 공동체의 진실과 그 진실들 사이의 괴리를 아프게 꿰매고 있다.

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온 이균영은 『어두운 기억의 저편』『불붙는 난간』『노자와 장자의 나라』 등의 소설집을 펴내며 84년에는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또 진보적 역사학자로서 민주화 투쟁에 앞장 섰으며 93년에는 한국독립운동의 주요 흐름인 신간회의 실체를 규명한 연구로 단재학술상을 받기도 했다.

문학과 역사 양쪽에서 뛰어난 재능과 성과를 인정받다가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이균영의 이번 작품은 찢긴 개인의 시각과 사회적 이념의 실체를 드러내며 그 통합을 문학적.인간적으로 시도한 필생의 역작이다.

"역사에는 얼마나 많은 예외와 개별들이 갖가지 쓰레기들과 뒤섞여 파묻혀 있는 것인가. 역사의 물결 앞에 개인은 다만 나약한 희생자인가. 그렇지만 우리는 누군가 그 역사의 물결을 거슬러 개인을 이야기하면 지체 없이 그를 공격할 것이다."

『떠도는 것들의 영원』은 위와 같이 진보적 이념 과잉 시대.진보적 시각에 동조하면서도 반성적.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대기업 사보담당 기자를 주인공 화자(話者)로 내세워 8명의 '광복 50주년 기념 백두산 여행'을 다루고 있다.

이념서클 대학생 3명, 정년 퇴직한 역사학과 교수, 일본인 기업가와 그를 안내하기 위해 따라 나선 50대 중소기업인, 상고 출신의 오피스 걸, 그리고 어떻게든 이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는 중국 조선족 가이드가 백두산 일대를 여행하면서 그들의 각기 다른 삶과 역사적 시각을 드러낸다.

항일 무장 투쟁의 현장을 둘러보면서 대학생들은 김일성의 무장 항일투쟁과 북한 정권의 정통성을 허물어질 수 없는 논리로 주장한다. 퇴직 교수는 항일 운동사에 정통한 입장에서 항일 투쟁사의 갖가지 줄기와 성공과 좌절의 실상을 꿰가면서 김일성만을 항일운동의 영웅으로 내세우는 것은 무리임을 일깨우려 한다.

여기에 자신도 60년대 학번으로 데모를 했다는 사장은 그 대학생들에게 '차라리 북한으로 가서 굶주리며 살아보라'는 입장을 취한다.

극좌.극우, 남북의 시각과 중도적 시각의 실상을 그들을 통해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들이 아니라 이들의 이야기에 방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오피스 걸과 가이드를 통해 시각이나 이념을 개인의 구체적 삶으로, 역사를 문학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오피스 걸은 이념을 떠나 오로지 동족과 이웃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다 백두산 어디에선가 숨진 할아버지의 혼을 찾아 백두산에 올랐다. 거덜난 사회주의의 부패의 표상으로만 보였던 가이드는 백두산 천지에 오르면서부터 순정한 사회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개방된 사회에서는 추악하게 벌더라도 돈이 필요하다며 자신의 아내까지 술좌석에 내놓던 가이드는 옌볜대 교수였으며, 그런 추악한 자본주의 사회 넘어 그는 아직도 너남없이 함께 잘 사는 원시공동체 사회를 꿈꾸고 있다.

일곱 가지 색깔이 잘 어울려 지상과 천상의 다리를 놓고 있는 백두산 천지의 무지개 같은 세상을 보여주며 일행의 화합을 이끌어낸 가이드. 그는 세상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맹목적 이념과 속된 자본주의에 아파했던, 역사적 진실과 문학적 진실 사이에서 괴로워했던 이균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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