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시위대가 점거한 거리 ‘실탄 발사 구역’ 지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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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방콕의 쇼핑 중심가 라차프라송 거리는 격렬한 전투가 휩쓸고 간 격전지를 방불케 했다. 전날 시위대가 군경의 접근을 막기 위해 폐타이어에 불을 붙이자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다. [방콕 AP=연합뉴스]

16일 오후 태국 군경과 반정부 시위대가 대치 중인 태국 방콕의 쇼핑 중심가 라차프라송 거리는 격렬한 전투가 휩쓸고 간 격전지를 방불케 했다.

시위대가 폐타이어와 차량 등에 불을 질러 거리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고급백화점과 명품상점들은 모두 셔터를 내렸고, 거리는 쓰레기와 타이어·돌들로 넘쳐났다. 멀리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음도 간간이 들려왔다.

◆13일 이후 30명 숨져=사제 화약총과 새총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와 중무장한 군경 병력 사이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자동소총과 M-79 유탄발사기로 무장한 일부 시위대는 군경의 저격을 피하기 위해 바리케이드나 트럭 뒤에 바싹 붙어 있었다. 군은 총기로 무장한 시위대를 500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방콕응급의료센터에 따르면 13일 오후부터 16일 밤까지 양측의 충돌로 30명이 숨지고, 232명이 부상당했다. 3월 중순 시위가 시작된 이후로 따지면 59명이 목숨을 잃고 1700여 명이 다쳤다. 그러나 16일에는 대치 상황이 다소간의 소강국면으로 되돌아가 인명피해는 시위 현장을 지켜보던 여성 1명이 머리에 총을 맞고 숨진 정도에 그쳤다.

희생자가 줄었다고 긴장이 늦춰진 것은 결코 아니다. 태국 정부는 이날 시위 지역에 대한 봉쇄 작전을 계속 강행하기로 했다. 또한 정부는 5개 주에 비상사태를 추가로 선포했다. 이에 따라 비상사태가 내려진 지역은 방콕 외에 22개 주로 늘어났다. 더불어 방콕 내 모든 학교의 개학 시기를 일주일 늦췄고, 17·18일을 공휴일로 정했다.

◆“정부, 결코 물러서지 않아”=아피싯 웨차치와 총리는 15일 밤 TV연설을 통해 “정부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태국군은 15일 시위대가 점거하고 있는 라차프라송 거리 주변의 라차프라롭 지역을 ‘실탄 발사구역’으로 정하기도 했다. 이 지역에서 소요 사태를 일으킬 경우 실탄을 쏘겠다는 것이다. 군경이 시위지역 봉쇄에 그치지 않고, 조만간 강제 해산 작전에 돌입할 것이라는 소문도 무성하다.

◆“탄압 중단하면 협상 용의”=이에 맞선 시위대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군경의 발포가 그치지 않는 한 대화는 없다’며 자체 결속에 나섰다. 시위를 주도하는 UDD(일명 레드셔츠)의 지도자 나타웃 사이쿠아는 “정부 측이 군부대를 철수하고 모든 폭력행위를 중단하지 않으면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나타웃은 그러면서도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은 추가 인명 피해를 막는 것”이라며 “군부대가 시위대에 대한 탄압을 중단한다면 정부 측과 협상을 재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 측이 휴전을 명령하고 군부대를 철수시킨다면 시위대도 물러날 것”이라며 정부 측에 협상 재개를 촉구했다. 붉은 셔츠를 입고 시위에 참가한 부부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는 플래카드를 손에 들고, “폭탄 따위는 무섭지 않다.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북동부 치앙마이에서 왔다는 키티칸차나(43·여)는 “쌀 추수기이지만 쌀값이 오르든 내리든 손에 떨어지는 돈은 정말로 얼마 안 된다”며 “현 정부는 물러나라는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 달이 넘는 점거 농성 탓에 지친 표정이 역력한 시위 참가자도 많았다. 군경의 봉쇄 작전으로 점거지역의 시위자 수는 1만 명에서 현재 6000여 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시위대 지도부는 꺾일 줄을 몰랐다. 이들은 “군경의 무차별 발포로 시위와 무관한 일반인들도 희생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희생자들 중에는 시위대가 아닌 일반 시민들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민심이 더욱 흉흉해지고 있다.

◆아피싯, 반 총장에게 “개입 금지”=정부와 시위대 양측의 대화 재개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국내외에서 거세지만, 양쪽 모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극한 대립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막다른 상황 때문에 현지 언론들은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중재에 나서지 않을 경우 최악의 유혈사태를 맞을 수도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시위대 지도부는 “푸미폰 국왕이 사태 해결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들은 또한 “시위대와 정부 간 협상을 유엔이 중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피싯 총리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현재의 정정불안은 태국 내부의 문제이고 외국과 국제기구들이 개입하는 것은 사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는 내용의 e-메일을 보냈다고 파니탄 와타나야곤 정부 대변인이 이날 밝혔다.  

한편 태국국가안보위원회는 이날 “축출된 탁신 친나왓 전 총리와 연관된 106개 은행계좌가 반정부 시위활동과 관련된 것으로 밝혀질 경우 동결될 것”이라고 밝혔다. 시위대의 자금줄을 끊겠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정용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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