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욱 대기자의 경제 패트롤] 재정 더 튼튼히 해야 할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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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그리스발 남유럽 재정위기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다. 7500억 유로(약1100조원) 규모의 유럽안정기금 조성 합의로 진정 기미를 보이던 유럽 금융시장은 지난 주말 증시가 3% 이상 폭락하고 유로화는 18개월 만에 최저치로 떨어지는 등 다시 불안한 기미를 보이고 있다. 자금지원을 받는 대신 강력한 긴축정책을 펴기로 합의했던 그리스에서는 이에 반발하는 파업과 시위가 계속되고, 양대 노총은 연금개혁안 철회 등을 요구하며 이번 주 총파업을 예고하는 등 사회적 불안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금융시장이 그리스가 과연 약속한 대로 재정적자를 줄여나갈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위기의 연장선에 서 있는 다른 남유럽 국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출 줄이기란 이렇듯 힘들다.

지난 주말 국제통화기금(IMF)이 일본에 소비세를 올려 재정을 건전화하라고 권고했다. 일본의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지난해 기준 217.7%로 선진국 평균의 거의 세 배에 이른다. 남유럽 재정위기의 진원지 그리스(115.1%)보다도 두 배 가까이 높다. 물론 일본의 경우 국채 대부분이 자국에서 소화되는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어 외부 리스크가 작다는 특징이 있지만 이런 기형적 상황이 계속 유지되리라고는 장담하기 어렵다. 일본의 국가채무비율이 늘 이렇게 높았던 건 아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의 국가채무비율은 60%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이후 버블 붕괴가 시작되면서 경기대책의 일환으로 남발된 각종 사업비용과 이자부담, 2000년대 이후 고령화의 급속한 진전에 따른 복지지출 증가로 채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성장에 의한 자연적 세수증가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재정건전화를 위해서는 소비세율 인상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있었지만 정치적 명운을 걸고 처리하겠다는 정권은 아직껏 나타나지 않았다. 세금 올리기도 이렇듯 어렵다.

한국의 재정건전성은 통합재정수지나 국가채무비율 등 여러 지표상 여타 주요국에 비해 분명히 양호한 수준이다. 단기적으로 크게 악화될 요인도 현재로선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보름 후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당과 후보들이 내놓는 공약들엔 재정에 대한 걱정이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우리에겐 중장기적으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인들이 있다. 우선 복지지출 문제다. 무엇보다도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고령화로 인해 현 복지제도만으로도 연금·보험 등 의무지출은 급속하게 불어날 수밖에 없다. 잠재성장률이 낮아지고 저출산 여파로 담세 인구가 줄어들 상황을 감안하면 부담은 더 커진다. 여기에 우리에겐 통일 문제가 있다. 통일 후 10년에 걸쳐 연간 GDP의 7∼12% 정도 들 것으로 예상되는 통일비용은, 사상 최대라는 지난해 경기부양 지출(GDP의 3.6%)과도 기간·규모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양쪽 다 눈앞에 닥치지 않았다고 모른 체해서도, 정권을 잡는 세력에 따라 달라질 수도 없는 이 시대 우리 국민이 안고 있는 기본적 문제다. 재정건전성을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보수적으로 유지·관리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태욱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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