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만에 디지털로 잠 깨어난 5238만 자의 지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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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호 20면

천년의 성보(聖寶), 천년의 문화콘텐트.
경남 합천 해인사에 간직된 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을 일컫는 말이다.
해인사 입구에는 요즘 ‘2011년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대축전’이란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팔만대장경의 원조 격인 초조(初雕)대장경이 고려 현종 때인 1011년부터 새겨진 것을 기리려는 행사다. 이 경판은 10세기에 만들어진 중국의 ‘북송칙판대장경(北宋勅版大藏經)’에 이어 세계 두 번째 목판 대장경이지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을 낳은 산파역을 했다.

21일은 음력으로 사월 초파일, 불기 2554년 석가탄신일이다. 한국 불교는 해탈과 중생 구제라는 화두 말고도 ‘호국 불교’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팔만대장경은 그 목표들을 하나로 집약시킨 결정체다. 고려인들은 거란족과 몽골족의 침략으로 전 국토가 유린당하던 시기에 세계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문명총서를 남겼다. 그것이 인쇄기술과 문화, 종교사상에 미친 영향은 열거하기 힘들다.

1251년 완성된 팔만대장경은 불교를 믿는 동아시아에서 백과사전과 같은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불법의 맥을 잇고 불교 탄압을 이겨내게 하는 숨은 힘이었다. 일본은 고려 말부터 조선 중기에 이르는 140여 년간 끊임없이 팔만대장경을 탐냈다. 일본 사신들은 대장경 인쇄본을 달라며 때로는 간청하고 때로는 협박했다. 선진 불교문화와 지식 콘텐트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대장경은 산스크리트어 ‘트리피타카(tripitaka: 세 개의 광주리)’를 번역한 말이다. 경(經: 부처가 말한 가르침), 율(律: 계율과 규칙), 논(論: 연구논문)의 세 가지 경전을 총칭한다. 인도에선 불교 초기에 나뭇잎으로 패엽경을 만들었지만 티베트·중국·한국·일본에선 석판·목판·금속활자 등으로 경전을 새겨 나갔다. 하지만 인쇄물이 아닌 목판이 온전히 보존된 것은 전 세계적으로 팔만대장경이 유일무이하다. 팔만대장경은 중국의 목판기술을 재창조해 최고 문물의 경지까지 발전시킨 사례로 꼽힌다. 한민족이 갖고 있는 문화강국의 저력을 말해준다.

팔만대장경을 숫자로 뜯어보자. 먼저 8만1258장의 경판에 새긴 전체 글자 수는 약 5200만 자로 추산된다. ‘조선왕조실록’의 약 5600만 자와 거의 맞먹는다. 박상진 박사는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김영사)에서 경판과 마구리의 총부피를 446㎥(사방 10m×높이 4.46m), 무게 280t이라고 추산했다. 이것을 만드는 데 들어간 나무 수는 1만∼1만5000그루(지름 50∼60㎝ 기준)일 것으로 보았다. 또 경판을 새기는 데 연인원 130여만 명이 동원됐을 것이라고 한다. 보조 인력을 빼고 달인의 경지에 이른 장인(匠人)만 계산해 12년간 매일 300∼1000명이 일했을 거라는 얘기다.

더욱이 팔만대장경판에 새긴 구양순체 글씨는 한 사람이 쓴 것처럼 가지런하다. 추사 김정희는 이것을 보고 난 다음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신선의 필체(非肉身之筆 乃仙人之筆)”이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더욱이 오·탈자는 물론 내용상 오류를 찾기 힘들다는 서지학자들의 평가까지 뒤따른다.

팔만대장경에 쓰인 한자(漢字)는 1만2000자 안팎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글자 하나에 최고 80가지 자종(字種)이 있는 등 한자 구사가 변화무쌍해 이것을 완전히 해독하려면 7만 자 이상을 알아야 한다. 그중에는 산스크리트어를 음차(音借)한 것도 많아 해독 불가능한 부분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팔만대장경을 지금 만든다면 얼마만한 돈이 필요할까. 대장경 연구를 오랫동안 해온 종림 스님은 “고려시대의 정성과 재료, 기술에는 절대 미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경판 한 장에 최소한 300만원은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총 2500억원이 필요한 셈이다. 쌀값으로 따지면 138만 가마(80㎏×18만원)에 맞먹는다. 고려시대의 인구와 국력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지금도 대장경을 한 번 청소하려면 3년의 시간과 3억원의 비용이 소요된다.

초조대장경 천년을 맞이해 해인사는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고 있다. 해인사 주지인 선각 스님은 “내년에 열릴 ‘천년 축제’에선 해인사의 자연·역사·종교·문화를 망라한 ‘대장경의 정신’ ‘선(禪)의 세계’를 널리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팔만대장경의 첫 외출도 이뤄진다. 다음 달 초 서울에서 열릴 ‘세계기록유산 전시회’에 법상경 경판 1매가 나가는 것이다. 선각 스님은 “국민 속으로, 세계 속으로 나가야 보물의 참다운 가치가 발휘될 것”이라고 말했다. 법상경은 ‘미혹에서 벗어나려면 끊임없이 참선하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중국·일본·인도·태국과 경전 교류사업을 펼치면서 ‘디지털 대장경’을 만드는 사업도 추진되고 있다.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달리 만들어진 경전이 디지털 세계에서 소통과 융합의 과정을 거쳐 미래의 지혜가 담긴 글로벌 콘텐트로 거듭날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장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도 기다린다.
가야산의 맑은 산바람을 마시며 천년의 숨결을 이어온 고려대장경. 이제 긴 기다림에서 깨어나 우리에게 깨달음의 세계를 열어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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