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 스타로지] 주눅 들지않은 겸손 류승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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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그와 대면하고 5분 정도 지났을 때 갖게 된 느낌의 정체는 뭐랄까 일종의 유쾌한 배신감이었다.

화면 속에서 튀어나온 그는 지나치리만큼 조신했고 조심스러웠다. 갑판에 던져진 생선처럼 싱싱했지만 비린내는 없었고 무엇보다 비늘이 해맑았다.

이것도 연기가 아닐까 조바심이 날 정도였는데 그거야말로 낡은 세대의 해묵은 걱정거리임이 곧 밝혀졌다.비켜가듯 "준비한 거냐"고 슬쩍 물었을 때 보여준 진실한 웃음이 그 해답이었다.

인생을 이야기할 때는 내용과 함께 말하는 형식도 중요하다. 자칫하면 신파조로 윤색될 수도 있는 류승범의 이력은 군더더기 없는 그의 직설화법으로 오히려 빛났다. 그가 걸어온(달려온)길 위에 지금 출연하는 드라마 제목처럼 '화려한 시절'의 흔적은 없었으나 주눅들지 않은 겸손함에는 단단한 자신감이 만져졌다. 그 뒤에 그의 형(영화감독 류승완)이 있었다.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그는 악기 연주를 배우고 싶어 하는 신세대 웨이터로 나온다. 실제로 그의 어릴 때 소망은 음악인이었고 첫 직업(?)역시 그 언저리에 해당하는 DJ였다. 배우로서의 그를 조제(조련)한 건 하늘 아래 (어찌 보면 하늘 자체일 수도)하나뿐인 그의 형이었다. 그에게 영화는 철저히 '형이랑 같이 하는 일'이었다.

처음 찍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부터 지금 찍고 있는 '피도 눈물도 없이'까지 모조리 형이 감독했다. 그에게 형은 영화의 안과 밖에서 두루 감독이었다. 형이 감독하지 않은 '와이키키 브라더스'(감독 임순례)조차 형이 "하는 게 좋겠다"고 권해서 했다니까.

이 용감한 형제가 만든 영화들은 이른바 저예산 독립영화다. 독립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어떠한가. 자유와 허전함이다. 그의 이미지 역시 그것들과 닮았다. 짐작하다시피 이 배우를 키운 건 천장과 의자가 있는 교실이 아니었다. 그를 키운 건 오히려 바람과 빗물이었다. (그는 신파가 아닌데 그를 묘사하는 나의 문체가 신파인 건 또 무슨 일인가. '스물 한 살의 비망록'이라는 노랫말 중에 "잠깨는 들꽃에 이슬 돋는 소릴 들으며 오늘을 생각하리"라는 부분이 나온다. 내 앞의 그는 지금 꽉 찬 스물 한 살이다.)

"길을 따라가기보다는 길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예사롭지 않은 말들이 술술 나온다. 책을 많이 읽느냐는 우문(愚問)에 돌아오는 그의 현답(賢答)이 질문자를 초라하게 한다."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죠."

하기야 우리 교육의 문제점은 생각할 시간을 좀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생님들은 가끔 혼동하신다. 특히 두 종류의 아이들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문제아와 문제의식을 가진 아이들. '생각이 많은' 그는 물론 후자다.

"연기를 기술만으로 하게 되면 언젠가 가짜임이 드러나게 되죠." 이 말에 적이 안심이 된다. 하기야 어설픈 연기자들은 정치판에만도 넘쳐난다. 그의 살아 숨쉬는 연기가 가상한 건 그 때문이다. 배우를 보면 대개 상품성과 작품성의 비율이 보이는데 그에겐 그 요소들이 분할되어 겉돌지 않았다. 잘 자라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절로 든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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