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일 양곡유통위원장 "인하폭 아예 높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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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그동안 국회 동의과정에서 덤으로 수매가 인상폭을 올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인하폭을 높게 건의해야 국회에서 손대지 못할 것이란 위원들의 의견이 많았습니다. 쌀시장 추가 개방을 목전에 두고 가격을 한꺼번에 낮춰 충격을 주는 것보다 지금부터라도 차근 차근 국제가격과의 차이를 줄여 나가며 대비해야 한다는 위원들의 절박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지난 16일 밤 사상 처음으로 추곡 수매가 인하를 결정한 양곡유통위원회의 정영일(鄭英一.61)위원장(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그는 "나도 농민의 자손"이라며 이번 결정이 농촌을 위한 고뇌의 결단이었음을 강조했다.

"더 이상 가격을 올리기보다 소득을 보전하고 농가 경영을 안정시키는 대책으로 대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이 소신입니다."

농민단체의 반발 때문인지 발표 직후 한동안 전화 연락이 끊긴 끝에 18일 겨우 선이 닿아 만난 자리에서 "사실 상당수 위원들이 지난해부터 추곡가를 내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소식을 들은 농민들의 반발이 벌써 거세다.

"수매가를 더 이상 올려선 안된다는 인식은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산지가격이 정부 수매가를 밑돌고 재고가 전체 소비의 20%를 육박하면서 쌀 문제가 심각하다는 인식이 많았다. 더구나 지난해에는 양곡유통위원회가 사실상 동결을 뜻하는 0~2%의 인상안을 건의했는데 정부와 국회를 거치면서 4% 인상으로 결정됐다. 이번에는 급증하는 쌀 재고 때문에 농정의 기본 틀을 바꾸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생긴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회의를 했다."

-농민단체들은 현행 수매가격이 생산비에도 못미친다며 인하는 말이 안된다고 주장한다.

"나도 우루과이라운드(UR) 당시 농촌경제연구원장을 지내며 농촌 문제에 대해 누구 못지 않게 고민한 사람이다. 현재 농가소득은 도시근로자 소득의 91% 수준으로 낮아져 정부 대책을 요구하는 농민들의 요구는 일면 타당한 점도 있다. 그렇다고 더 이상 가격지지 정책으로 농민을 지원했다가는 앞으로 살 길이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직불제로 소득을 지지하고 고령 농가의 은퇴 등을 통해 젊은 농가의 대규모 영농을 유도하는 경영이양 제도 도입으로 정책을 바꿔야 한다. 이를 위해 추곡 수매가의 인하는 가장 먼저 필요한 조치다. 정부는 앞으로 쌀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양에서 질로 정책목표를 전환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농민들을 설득하고 안심시켜야 한다."

-5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의에서 논란이 많았을 텐데.

"(오래 머뭇거리다가)다른 위원들의 입장도 있기 때문에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렵다. 회의는 처음에 위원들 각자가 적정 추곡수매가 폭을 적어내는 방식으로 시작됐다. 뚜껑을 열어보니 상당수가 5%대의 인하를 주장해 적잖이 놀랐다. 3~6% 인상을 주장하던 농민단체 대표들이 '서운하다'는 말과 함께 일제히 퇴장한 뒤 2차 투표에서 대다수가 4~5%의 인하를 주장해 채택한 것이다."

-뉴라운드 출범으로 더욱 어려워진 우리 농업을 살릴 길은 무엇인가.

"이제부터는 농민과 농촌 주민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 농촌도 앞으로는 농민과 비농민이 섞여 사는 '혼주(混住)사회'로의 진입에 대비해야 할 때다. 그러려면 전체 농민의 30%를 차지하는 고령 농가가 갖고 있는 농토와 재산을 현금화하고 정부 보조 등을 더해 노후 인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땅을 젊은 농민들이 장기 융자로 넘겨받아 대규모 영농화로 나아가야 한다. 양곡거래소를 만들어 민간의 쌀 가격결정 기능을 부활하고 전체 생산량의 15%로 가격조절 기능이 사라진 추곡수매 제도를 시가로 매입해 보관하는 공공비축제도로 바꿔야 한다. 농민들도 정부가 할 일과 생산자로서 자신들이 맡아야 할 일을 구분해야 한다. 농사를 많이 지어놓고 정부더러 무조건 다 사달라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

-정부에 바라고 싶은 점은.

"농민들의 반발을 무마하는 차원의 대책이 아니라 우리 농촌을 어떻게 살리느냐는 근원적인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농업정책은 경제논리로만 보기 어려운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한 분야다. 개방으로 이득을 보는 분야에서 사회적 비용 차원에서 적정한 보상을 해줄 수 있어야 사회가 안정될 수 있다는 점을 국민이 깨달아야 한다."

홍병기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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