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 金 살해사건… 5공말기 안기부 알고도 은폐 의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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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수지 金씨 피살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에서 金씨가 남편 윤태식씨를 납북하려 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 1987년 당시 안기부가 金씨를 북한공작원으로 발표한 배경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의혹의 핵심은 당시 안기부가 86년의 5.3 인천사태와 건국대 사태 등에 따른 국내정치 상황에 이용하기 위해 金씨를 북한공작원으로 조작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정원이 당시 사건처리 경위를 조사해 밝혀야 한다는 지적이다.

◇ 당시 상황 및 의혹=尹씨는 87년 1월 9일 김포공항에 나타나 기자들에게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아내(수지 金)와 대사대리 이창용으로부터 '서울에서 사업을 하며 문익환 목사와 유성환 의원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그런데 검찰이 이 두 사람을 구속했으며 신상옥.최은희는 남조선에서 살해됐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라는 강요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후 尹씨는 안기부에서 4개월 가량 강도높은 조사를 받았다. 조사 중이던 1월 26일 홍콩 언론들은 金씨의 시체가 尹씨와 살던 아파트에서 발견됐다고 보도했으나 안기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더구나 홍콩 경찰은 당시 우리 정부에 대해 金씨 피살사건의 주요 용의자인 尹씨를 넘겨달라고 요청했으나 우리 정부는 이를 거부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지검 신태영(申泰暎)1차장은 "15년 만의 수사지만 우리가 한 것은 홍콩 자료를 넘겨받아 이를 근거로 尹씨를 추궁한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尹씨가 싱가포르에서 미국대사관을 거쳐 한국대사관에 이송됐을 당시 보인 태도도 안기부의 사건 조작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당시 싱가포르 주재 대사관 직원들은 "북한대사관에서 탈출했다"는 尹씨 진술에 일관성이 없어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안기부측은 대사관에 오히려 '각 언론사에서 싱가포르로 기자를 보내게 할테니 기자회견을 준비하라'고 공문까지 보냈다는 것.

◇ 金씨 가족들의 한=수지 金씨가 북한 공작원으로 둔갑하는 바람에 金씨 가족들도 '간첩 가족'이라는 굴레 속에서 고통받으며 살았다. 金씨의 어머니(金씨 아버지는 74년 사망)는 87년 당시 안기부에 불려가 욕설을 들으며 조사받았으며, 딸의 누명이 벗겨지는 것을 보지 못한 채 97년 세상을 떠났다. 尹씨를 고소해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金씨의 오빠는 지난해 7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등 가족들의 불행은 끊이지 않았다.

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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