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현 교수 "포스트 민족주의로 전환" 주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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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민족주의'건 '닫힌 민족주의'건 모두 폐쇄적 민족 절대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다. 탈(脫)민족주의(포스트 민족주의)가 필요하다."

'민족주의 비판'의 선봉장 임지현(45.한양대.서양사)교수가 칼집에 반쯤 꽂아뒀던 칼을 완전히 뽑아들었다. 민족주의에 대해 "이제 할 말을 다 하겠다"는 자세다.

그의 영향으로 한국 지식사회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 중이던 '열린 민족주의'조차 옳은 방향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그의 주장은 궁극적으로 '민족 통일이 과연 우리 사회의 최우선 가치인가', 또 '남한 사회가 북한의 인권 문제를 왜 당당히 제기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으로까지 확대된다.

임 교수는 오는 27일(토) 오후 1시30분 이화여대에서 열리는 '전국 대학 인문학연구소 학술대회'에서 '포스트 민족주의 대 열린 민족주의'란 논문을 발표한다. '열린 민족주의'에서 '포스트 민족주의'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24일 전화통화로 그의 주장을 들어봤다.

◆ '민족 통일'이냐 '민족 인권'이냐=임 교수에 따르면, '민족 통일'을 최우선 가치로 놓는 것은 '통일 본질주의'며 그 밑에는 '민족 본질주의'가 깔려 있다. 그가 '인권'이 최우선 가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통일도 인권도 모두 얘기할 수 있으며, 어느 하나만이 절대선이라고 강변하지 말라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일종의 '가치 상대주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민족주의의 영향력이 막대한 만큼 그의 '민족 상대주의' 주장이 갖는 파급력 또한 크다. "'민족'이라는 개념의 현실적 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에요. 민족이나 통일이나 인권이나 각기 상황에 따라 우선순위가 매겨질 수 있는 다양한 가치 중의 하나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통일 지상주의'에 대해서도 이견을 내놨다. "남북한 주민이 보다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궁극적 목표라는 관점으로 보면 통일은 여러 길 가운데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지요. 주민의 행복을 생각한다면 북한의 인권 문제도 제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걸 못하는 이유는 바로 통일 전까지는 참아야 한다는 '민족 본질주의'때문입니다."

◆ 민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임 교수는 1999년에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소나무)를 펴냈다.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제목의 책을 통해 단일 혈통과 공통의 조상, 그리고 민족의 영속성을 공동체의 최우선 가치로 강조하는 '혈통.종족 민족주의'의 폐쇄성을 강하게 비판했다. '혈통의 민족'이란 울타리에 포함되지 않는 수많은 가치와 사람들을 배제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민족이란 근대 이후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생각이 비판의 뿌리였다.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와 같은 '공격적 민족주의'를 식민지 과정에 형성된 '수동적 민족주의'와 구별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주류였고, 남북 통일을 앞두고 '민족주의의 효용성'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주장도 많았다.

이 같은 반론을 감안해 당시 그는 자신의 주장을 '시민적 민족주의'라고 정의했다. 민주사회의 시민적 가치를 강조한 용어다. 세계화로 대변되는 국제 환경의 변화도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그의 주장은 우리 사회의 '민족주의 과잉'을 지적하기에 충분했다. 이후 한국 지식사회에 일종의 타협점으로 형성된 것이 바로 '열린 민족주의'였다. 그런데 그가 '열린 민족주의'마저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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