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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익의 인물 오디세이] 경복궁 복원 도편수 신응수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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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조선총독부 건물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한 건 지독한 아이러니였다.

일제하 36년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 전체가 식민화된 것 같은 감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새 박물관도 없이 그 건물을 헐기로 했을 때, 그 많은 유물은 어떡하느냐는 논란이 벌어진 게 엊그제 같은데, 마침내 그 자리에 조선시대의 원래 주인인 흥례문이 들어섰다.

서울이 6백년 넘은 고도라 하나 그다운 모양새가 빈약해 괜히 지나가는 외국인 보기가 민망하던 차에 조선시대의 상징인 경복궁이 착착 옛 모습을 찾으니 잘 됐다 싶고, 또 앞으로 식민 아니라 그보다 더한 불행이 닥쳐도 유적을 때려부수는 반문명의 행패는 없을 것으로 보이니 이제 경복궁은 세기를 이어가는 우리의 유산이 될 터이다.

흥례문 낙성식이 있은 지 며칠 후 어느 신문의 한 귀퉁이에 흥례문과 그 권역(圈域)역사(役事)에 몸바친 목수들이 가장 기뻐해야 할 낙성식 당일에 씁쓸한 기분으로 술잔을 기울였다는 읽기 민망한 기사가 실렸다.

관리 등속의 웃음은 난발했지만 정작 그날의 주인공인 목수들에게는 변변한 자리조차 마련되지 않았고 제대로 된 악수 한번 건네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디세이가 조촐하나마 우리 시대 최고의 대목장(무형문화재 제74호)이자 경복궁 복원의 도편수인 신응수(60)씨를 모셨다.

큰 한옥을 짓는 일에는 나무.돌.기와.미장 등을 다루는 열두 분야가 필요한데 각 분야의 우두머리를 편수라 하고 도편수는 이 편수들을 지휘하는,곧 건축의 전과정을 감독하는 직책을 말한다.

신씨는 1991년경복궁 복원을 시작해 95년 각각 임금과 중전의 침소였던 강녕전과 교태전을 완공했고,99년 세자와 세자빈이 거처한 동궁지역을 완성했으니 흥례문 권역까지 합치면 꼬박 10년을 노력해왔다.

그러니 먼저 보람찬 감회를 묻는 것이 순서이겠으나 그의 씁쓸할 것 같은 기분이 더 궁금해 생략하고 "많이 섭섭했지요"하고 물었다. 그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신문에 한 번 났으면 됐지 왜 사람을 또 곤란하게 하느냐는 투다.

"기자로부터 '감회가 어떤가' '좋은 꿈 꿨나'하는 전화가 와 '행복하다'고 대답했지요. 그런데 낙성식에 갔더니 자리가 하나 있나, 현판 만든 이, 글 쓴 이도 꽃 달고 줄을 당기는데 그냥 보고 있자니 솔직히 언짢더군요. 목수들 하고 딴 데 가서 술 한 잔 하는데 기자에게서 또 전화가 와 말 끝에 서운한 기분을 토로했더니 글쎄 그게 신문에 났더군요. 집을 다 지으면 장인들을 대접하는 건 옛날 문헌에도 나오고, 사찰이나 일반 공사에서도 그런 예우는 해주는데…. 장인들이라지만,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위로의 말 한마디면 확 풀어지는데 말이지요. 어쨌든 잊어버렸습니다. "

사실 그는 그 기사를 읽지는 못했다. 낙성식 후 또 소나무를 보러 삼척의 산 속에 가 있었던 것이다. 기사내용은 후배 목수에게서 휴대폰으로 들었다. 그는 허구헌 날을 태백산맥 산 속에서 보낸다. 우리 소나무 중 제일로 치는 동해안 소나무를 구하기 위해서다.

큰 한옥은 대체로 소나무로 짓는다. 궁궐은 오로지 소나무다. 흥례문에는 17만재(한 재는 가로.세로 3㎝에 길이 3.6m의 크기)가, 그 권역인 회랑 등에는 60만재 이상의 소나무가, 그것도 우리 소나무가 소용됐다. 외송은 경복궁 공사 전체 소요의 1.3% 정도, 북미산과 상징적 의미로 백두산송을 썼다.

-왜 소나무, 그것도 꼭 우리 소나무여야 합니까. (기자는 신씨를 만나 한옥 방면에 문외한임을 미리 밝히고 "도편수란 뭡니까" 따위의 좀 한심한 질문을 했는데 그 게 못마땅한지 대답이 쓱쓱 스쳐 지나가는 식이다. )

"어느 나라든 그 곳의 나무가 좋아요. 소나무는 쪼개 보면 직결이 아니어서 터지는 율이 적고 송진이 들어 있어 질긴데다 부패도 막아줘요. 근정전을 해체했더니(신씨는 현재 경복궁 근정전 해체 보수와 창덕궁 내 27개동 복원 공사를 지휘 중이다) 네 귀퉁이 기둥을 전나무로 쓴 걸 처음 발견했어요. 균열이 많이 나 있데요. 옛날에 왜 전나무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역시 강도는 소나무가 훨씬 높은 걸 확인했어요. "

-궁궐 짓느라 소나무가 엄청나게 들어가는데 환경 훼손 문제는 없습니까.

"환경 훼손을 하지 않는 걸 첫째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무슨 산 하나를 통째로 베는 건 전혀 없어요. 산림정책에 따라 간벌을 한다거나 임도를 낼 때, 또 수종 경신을 할 때 나무를 확보하지요. 96년인가, 대관령에서 강릉까지 4차선 도로 공사를 할 때는 1백20만재를 구하기도 했지요. 그것도 다 제 자신이 입찰에 응해 구하는 겁니다. "

소나무 구하기는 신씨의 사업이다. 좋은 소나무를 적기에 많이 구해 보관하고 있다가 도편수로서 신씨에게 집 짓는 주문이 들어오면 꺼내 쓰기 위해서다. 소나무 중에 제일은 적송(赤松)으로 나이테가 좁으며 속이 붉다.

나이테가 넓으면 쉽게 자란 나무여서 곧 속이 무르고 쉽게 터지며, 험한 환경에서 자라야 나이테가 좁고 강도가 단단하다.

사람 또한 그러하리라. 한옥 전문가로 유명한 신영훈씨는 신응수 대목장의 강릉 집하장에서 그 귀한 적송 더미를 보고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고 회고했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에게 영물 비슷하잖아요. 그렇게 베어내니 소나무에 미안하지는 않습니까.

"베기 전에 돼지를 잡아놓고 고사를 지냅니다. 큰 나무를 벨 때는 따로 고사를 지내요. 옛날부터 '큰집을 지으면 목수의 수명이 감해진다'는 얘기가 내려와요. 나무가 생명체인데 그것들하고 싸움을 하니…. 그래서 강원도 이곳 저곳에 소나무가 많은 산을 다 합쳐서 한 50정보 샀어요. 주로 석탄공사에서 판 것인데 내 생전에는 절대 베지 않을 겁니다. '수명 감축'때문은 아니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기도 하고요."

-나중에 큰 돈이 되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소나무를 키우고 싶은 마음이 우선입니다."

-고증 문제도 어려울 것 같고 99년에는 기둥에 균열이 났다고 감사원이 지적해 곤욕을 치렀지요.

"설계 도면 주는 대로 지으면 여기 틀리고 저기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경험과 남아 있는 건물이 말없이 고증하는 걸 신뢰합니다. 도편수 최고의 기술은 처마 선(線)같은 것을 찾아내는 예리한 눈썰미입니다. 틀림없어요.

감사원 지적은 글쎄요. 몇몇군데 몇 ㎜에서 1㎝ 정도의 균열은 불가피한 겁니다. 균열을 없애려면 송진을 다 빼야 하는데 그러면 빨리 썩어 버려요. 천년을 가야 할 건물 아닙니까.

그런데 매스컴은(그는 이 대목에서 약간 상기됐다) 나한테 어느 한 사람 확인 전화도 않고 보도했어요. 감사원에 가 따졌더니 없던 일로 하자 그러더군요." 그는 '잘해보자'고 나온 지적이기 때문에 지금은 유감이 없다고 했다.

-성격이 좀 괄괄하기도 합니까.

"감사원에 갈 때 청심환 한 알을 먹고 또 한 알은 주머니에 넣고 갔어요. 안압지 공사든 뭐든 도면 잘못된 거 고쳐가며 한 사람한테 이럴 수가 있나 싶기도 하고, 한 달간 속이 상해 술만 찾았어요."

신씨는 충북 청원군에서 태어나 충남 천안의 병천중학교를 졸업하고 1957년 당시 목수였던 사촌 형 신강수씨의 부름을 받고 상경했다. 야간학교라도 다니려고 했으나 뜻대로 안돼 사촌 형을 따라 대패를 잡았다.

그리고 그의 손재주를 눈여겨본 사촌형의 친구인 대목 박광석씨의 주선으로 60년에 전설적인 대목 이광규의 문하생이 됐다.

박씨는 이광규의 고향 후배였다. 이광규의 손에 이끌린 신씨는 이윽고 이광규의 스승이자 조선시대 궁궐 대목의 적자인 조원재의 문하가 됐다. 대목계에서는 이를 역사적 만남이라고 부른다. 62년 조원재 지휘의 남대문 중수 공사를 시작으로 궁궐 대목의 맥이 오늘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신씨는 그 때 남대문 공사에서 허드렛일을 했지만 조원재의 집에 기거하며 비술을 전수받았다.

-남대문 옆을 지날 땐 기분이 어때요.

"쓱 보고 말지요 뭐.저 추녀들이 우리 스승이 소리소리 질러가며 만들어 저리 잘 만들어졌는가 뭐 그런 생각."

-도편수가 소리소리는 어떻게 질렀어요.

"대패질은 90도로 밀어야 하는데 힘이 들어 45도 각도로 밀면 저 멀리서도 귀신처럼 알고 달려와 야단을 쳤지요. 그러니 아무도 도편수 옆에 안가는데,점심 먹을 땐 제가 제일 어리고 해서 옆에 앉으면 아무 말씀 않고 밥 몇 숟가락을 제 밥에 덜어주곤 하셨지요."

-신선생께서도 소리소리 지릅니까.

"현장에 가보면 잘된 것보다 잘못된 게 먼저 눈에 들어와요. 얼마나 귀한 나무입니까. 그래서…."

신씨는 75년 수원성곽 복원 때 장안문 등 모든 문과 누각을 만들며 도편수로 데뷔했다. 그 이후의 실적은 우리 스스로가 알아보는 것이 예의겠다.

-척 보면 저 나무가 어떤지 알겠군요.

"사람도 그렇지 않나 싶은데."

이헌익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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