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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지식사회에 묻는다] 7·끝 새로운 모델은 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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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우리 지식사회가 미증유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 난에 실린 지난 여섯 차례에 걸친 기고문에서 지적되었듯이 최근 우리 지식사회는 상업주의,정치사회 예속, 전문성 부족, 공론 규율 부재, 그리고 높은 대외의존성 등 크고 작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한 마디로 총체적 위기 속에 놓인 것이 한국 지식사회의 자화상이다.

지식사회의 이런 위기가 물론 갑자기 돌출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1997년 IMF 경제위기 당시 이미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 있다.

지식인의 과제 가운데 하나가 자기 사회에 대한 설득력 있는 분석과 전망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지식인들은 자기변명에만 급급했을 뿐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지 않았다. '지혜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 난다'지만, 이 땅의 지식인에게 그것은 견강부회이자 자기위안일 뿐이었다.

지식사회 분열이 전면에 부각된 지난 여름의 언론사태 문제도 마찬가지다. 공론장에서의 담론의 규율은 부정된 채 서로가 곡학아세라 비난하며 역시 문제의 본질은 비껴 나갔다.

담론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성찰은 은폐되고 말의 자유 또는 언론개혁의 당위만을 강변한 것은 오히려 권력 내지 반권력에의 종속을 증거하는 지식인의 초라한 초상(肖像)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전통적 지식인상의 종언(終焉)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이른바 '관료적 지식인'과 '저항적 지식인'의 종언이다.

지난 50년간 우리 현대사를 이끌어 왔던 양대 세력이 산업화세력(보수세력)과 민주화세력(진보세력)이라면, 이에 대응하는 지식인 그룹이 관료적 지식인과 저항적 지식인이다. 관료적 지식인이 전문지식을 십분 활용해 체제의 고도성장에 기여해 온 반면, 저항적 지식인은 권위주의에 맞서 그 체제의 민주화를 추구해 왔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인 집단은 최근 들어 서로 다른 위기에 처해 있다. 단적으로 관료적 지식인 그룹이 정치사회에 과도하게 예속돼 지식인의 자율성을 스스로 훼손해 왔다면, 저항적 지식인 그룹은 전문성 빈곤으로 대중적 관심과 영향력을 급속히 상실해 왔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변화를 초래했는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측면이 주목돼야 한다.

먼저 지적할 것은 민주화의 장기적인 영향이다. 지난 10여년간 민주주의 이행과 공고화는 지식인들에게 '어떤' 민주주의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을 요구해 왔다. 하지만 80년대식 거대 담론에 익숙했던 지식인들은 이에 적극 대응하지 못한 채 이념적 편가르기와 서구 이론 수입에 몰두해 왔다.

둘째 요인은 '탈물질주의 사회'의 도래다. 우리 사회에서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고도화되면서 경제적 욕구를 넘어선 환경.여성.문화, 무엇보다 미디어로 대표되는 탈물질주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져 왔다. 이는 곧 지식 담론의 새로운 시장이 등장했음을 알리는 것이자 전통적인 '지사적 지식인'의 조종(弔鐘)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것은 정보화와 세계화의 영향이다. 이 세계사적 격변은 우리의 일상생활은 물론 사회제도를 새롭게 재조직화하는 동시에 좌파와 우파로 상징되는 기존 정치 패러다임을 무력화해 왔다. 사회는 펜티엄급으로 업그레이드된 상황 속에서 지식인은 여전히 386급에 머물러 있는 것이 우리 지식사회의 현주소다.

90년대 후반 신지식인론과 지식 게릴라론이 부상했던 것도 이런 사회변동과 무관하지 않다. 신지식인이 정보사회의 도래에 따라 끊임없이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기술적 지식인을 말한다면, 지식 게릴라는 이제 경계가 불분명해진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넘나들면서 담론을 주조하고 논쟁을 벌이는 전방위적 지식인을 지칭한다.

그러나 신지식인이나 지식 게릴라가 새로운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지식인은 지식인의 특권인 비판적 이성이 박제된 공학적 지식인의 또 다른 이름일 따름이며, 지식 게릴라는 담론의 규칙들을 무시한 채 지적 선정주의만을 부추겨 온 경향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현재 당면한 지식사회의 위기는 시대변화에 조응하는 지식인이 부재하는 위기다. 지식인이 한 사회 내의 다수를 위한 비판과 대안을 모색하는 존재라면, 현재 우리사회 지식인들은 사회의 변화를 판독하고 그에 걸맞은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제3세대 지식인'이 요청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다. 제3세대 지식인이란 관료적 지식인과 저항적 지식인을 넘어서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성찰적 지식인'이다. 여기서 성찰은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먼저 그것은 당대 사회의 변화에 대한 과학적이면서도 겸허한 대면을 뜻한다. 오늘날 지식인이 사회 전체를 조망하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다양성과 복합성의 증대가 현대사회 변동의 특징인 한, 전체적 통찰이란 기실 아마추어리즘의 자기고백이자 사회로부터의 소외에 대한 자기방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바람직한 지식인상이란 지식인의 한계를 겸허히 성찰하되 자신의 전문지식과 그와 연관된 사회의 발전에 구체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지식인이어야 한다.

성찰은 또한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함축한다. 당대 세계사회를 주도하는 정보화와 세계화는 분명 과거와는 다른 사회질서를 형성해 가고 있다.

이 새로운 사회질서를 압축하는 개념이 곧 지식기반사회다. 지식기반사회의 도래를 과장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애써 외면해서도 안된다. 변화하는 자만이 살아 남는 '질주하는 세계'속에서 그 변화의 본질을 비판적으로 탐색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 것은 지식인이 가져야 할 당연한 의무일 것이다.

지식기반사회가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있음에도 정작 지식사회가 위기의 덫에 빠진 것은 커다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지식인이 여전히 자기 사회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존재라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21세기 세계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지식사회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제3세대 성찰적 지식인의 등장이 간절히 기다려지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김호기 교수(연세대.정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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