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균의 세상 탐사] 김정일의 중국 외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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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중국 외출 무대는 요란했다. 주도면밀한 ‘시위’였다. 중국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연출은 치밀했다. 김정일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9명 모두가 외출 쇼에 등장했다. 김정일의 동선에 처진 장막과 보안은 유별났다. 그것을 신비주의와 파격으로 위장, 포장하는 장면은 낡은 소극(笑劇)이다. 하지만 그 수법은 특이한 인상 효과를 거뒀다.

무대 연출의 초점은 두 나라 동맹의 과시에 있었다. 후진타오는 “우호를 대대손손 계승하는 것이 공통적 역사적 책임”이라고 말했다. 김정일은 “양국의 선대 지도자들이 손수 맺어 정성껏 키워낸 우의관계”라고 강조했다. 선대 지도자들은 김일성과 마오쩌둥(毛澤東)이다. 올해는 6·25전쟁 60주년이다. 중국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으로 부른다. 미국에 대항해 북한(조선)을 원조한 전쟁이다. 그때 중국인민지원군 18만 명이 숨졌다.

김 위원장은 귀로에 그 유적지를 들렀다. 중국의 선양(瀋陽) 근처에 있는 ‘항미원조 열사능원(烈士陵園)’에 참배했다. 그 입구엔 23m 높이의 추모탑이 있다. 혈맹의 과시다. 지난해 10월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북한 방문 때도 그랬다. 그는 평남 회천의 ‘중국인민 지원군 열사 능’을 찾았다. 그곳에 6·25 때 전사한 마오의 장남(마오안잉·毛岸英) 묘지가 있다.

이런 장면은 중국의 자신감을 상징하다. 올해로 한·중 수교 19년이다. 중국은 상당 기간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절제의 외교를 했다. 한국을 의식했다. 이젠 달라졌다. 중국은 동북아 질서의 재편을 도모한다. 105년 전 청일전쟁 패배로 잃은 이 지역의 패권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다.

중국은 외교 변화의 시위 기회로 천안함 사건을 잡았다. 그 방식은 김정일의 외출이다. 그 사흘 전 상하이에서 후 주석은 이명박 대통령을 만났다. 하지만 김정일 방문을 꺼내지 않았다. 민감한 시점에서 그것은 외교적 결례다. 중국은 자신의 존재감을 부정적 방식으로 한국에 각인시켰다.

천안함 침몰의 유일한 용의자는 북한이다. 한국과 미국은 북한 제재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후진타오와 김정일의 포옹은 북한을 함부로 제재해선 안 된다는 메시지다. 한·미 동맹에 못지않은 북·중 혈맹이 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진타오의 김정일 독점은 북한에 대한 중국의 배타적 권리를 천명한 것이다. 북한을 보호,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후견국임을 선언한 것이다. 김정일은 중국의 지원으로 천암함 사건의 고립에서 탈출하려 한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공짜는 없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계산에 밝다. 후진타오는 김정일에게 ‘전략적 소통의 강화’를 제안했다. “양국의 내정, 외교, 통치 경험 등에 대해 심도 있게 소통하자”고 말했다. 그 발언은 내정 간섭이란 인상을 준다. 권력 후계, 핵 개발, 미국과 협상을 놓고 중국과 사전에 의논하라는 메시지다. 대등한 정상회담에선 맞지 않는 어휘들이다. 그것이 극진한 대접 뒤 내놓은 중국의 청구서다. 김정일 정권의 중국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다. 이미 북한은 사실상 중국의 위성국 신세다. 북한이 내세우는 ‘주체’는 중국엔 초라한 외침일 뿐이다.

이명박 외교에선 일관성 유지가 우선이다. ‘선(先) 천암함 제재, 후(後) 6자회담’의 자세가 흔들려선 안 된다. 6자회담은 북한의 탈출구일 뿐이다. 미국과의 협조가 강화돼야 한다. 한·미 동맹이 헝클어지면 한반도의 전략적 질서가 무너진다. 중국은 동맹 없는 한국을 무시한다.

김정일의 베이징 외출은 북·중 관계의 특수성을 실감시켰다. 중국에 접근할 때는 정치와 경제를 적절히 분리, 혼합해야 한다. 한국은 중국과도 친해야 한다. 중국은 우리의 가장 큰 시장이다. 한·미 동맹을 단단히 하면서 중국과 잘 지내야 한다. 21세기 중화(中華)질서를 짜려는 거대 중국이 우리 옆에 있다.

박보균 중앙일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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