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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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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비보이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플래닛 비보이’는 한국 비보이들의 가장 큰 고민을 병역 문제라고 했다. 최고의 테크닉을 갖고 있는 한국 비보이들이지만 군대를 가게 되면 몸이 굳어질까 봐 걱정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비보이는 세계 최강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메이저 비보이 대회를 휩쓸었다. 단기간에 세계를 제패한 비법은 치열한 연습이었다. 연예인들처럼 많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한국의 비보이들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마룻바닥에서 땀을 흘렸다. 몸 관리를 위해 대부분의 비보이는 담배는 물론 술도 절제한다. 춤에 대한 이들의 열정은 젊은 층 사이에 비보이 열풍을 일으켰다. 스타 비보이 그룹은 한국뿐 아니라 북미와 유럽에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비보이 팬들을 실망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비보이 그룹 T.I.P 멤버들이 정신병자 행세로 군대를 면제받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면서 병역을 기피한 한 멤버는 “군대 가서 춤 실력이 망가질까 봐 두려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의 변명은 비겁하다. 군대를 마치고 재기한 비보이들도 있다. 정상급 비보이 그룹 ‘익스트림 크루’의 정영광은 “어차피 가야 할 군대라고 생각해 일찍 갔다 왔다. 제대 후 춤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지만 혼자 남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고 말한다. 비보이뿐만이 아니다. 전성기 때 군대를 가 공백기를 가졌지만 치열한 노력으로 다시 정상에 선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이 많다.

‘면제=신의 아들, 방위=장군의 아들, 현역=어둠의 자식들’. 1980년대부터 남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이다. 방위가 현재는 공익으로 대체됐을 뿐, 지금도 공감이 가는 ‘뼈 있는’ 소리다. 예전에는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군복 입은 사람이 대접을 못 받고 있다. 소위 ‘일빵빵’이란 전방 소총수로 군대를 갔다 오면 ‘빽’이 없거나 약지 못하다는 취급을 받기도 한다.

선진국 사회는 제복으로 상징되는 군의 명예와 전통을 존경한다. 스웨덴 경제의 3분의 1을 담당한다는 ‘발렌베리’ 가문의 후계자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는 게 필수 코스라고 한다. 조직을 이끌려면 군대에서 규율·헌신·리더십 같은 덕목을 배워야 한다는 취지다.

병역을 명예롭게 여기려면 우선 군대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군대에서 뭔가 배우는 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군대에서 배우는 건 담배와 ‘마초’ 문화밖에 없다는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병역에 대한 일반의 가치도 달라지기 어렵다.

정철근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