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노트] 음악인들 한국 정착 꺼리는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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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지난 8일 LG아트센터에서 열린 데뷔 리사이틀에서 쇼팽의'스케르초'전4곡과 무소르그스키의'전람회의 그림'을 들려준 피아니스트 김정원(26)은 무대를 압도할 만큼 큰 체격의 소유자였다.

강한 터치로 넘치는 자신감과 오케스트라를 방불케 하는 큰 울림은 음악적 깊이와 폭을 잘 드러냈고, 온몸을 활용한 테크닉도 눈부셨다. 아직 거칠긴 하지만 군데군데 자신의 개성을 과감하게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음악적 에너지의 분출을 추스르지 못해 연결 과정과 끝맺음이 흐트러지기도 했고, 악상을 더욱 섬세하게 부각시키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젊은 패기와 가능성만큼은 충분히 보여준 연주였다.

공연이 끝나고 로비에 장사진을 친 팬사인회 행렬을 보면서 음악계가 새로운 남성 피아니스트의 출현을 목마르게 기다려왔음을 실감했다.

남들이 다 알아주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금의환향의 무대를 꾸민 것도 아니다. 그가 최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쇼팽콩쿠르에서 아깝게 고배를 마셨으나 입상자 음악회에 초청을 받은 일화 때문만도 아니다.한동일.백건우.강충모.김대진 등 한국 남성 피아니스트의 계보를 이을 신예의 출현 가능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직업 연주가로 대접을 받으려면 아예 귀국을 포기해야 한다. 음악대학 교수.강사를 하지 않고 작곡.연주.평론으로 생활비 전액을 조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외국 무대에서 활동 중인 한국 연주자는 국내 무대에서는 턱없이 높은 개런티를 받는 데 반해, 일단 국내에 정착한 연주자는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무대에 세워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라는 식이다.

공연장이든 연주단체든 언제부터인가 외국 연주자나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 음악인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몸을 낮추고, 국내 음악인들에게는 막무가내로 군림하려는 태도가 몸에 밴 것처럼 보인다.

기자 스스로도 반성할 대목이지만, 언론에서도 국내 전문연주자의 무대에는 별 관심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음악인들이 너도 나도 대학교수가 되는 길을 찾는다. 신예 피아니스트의 출현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울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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