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철 파김치, 하루만 익혀도 밥도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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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호 09면

양파가 금값이어서 주부들이 울상이라는 기사가 포털사이트에서 금세 시선을 잡아끈다. 예년에 비해 양파값이 확실히 비싸긴 하다. 하지만 일부 언론의 이런 말들이 내게는 다소 호들갑스럽게 느껴진다. 봄 날씨가 하도 이상스러워 햇것이 제때 안 나오니 일시적으로 값이 올랐다 치자. 하지만 아무리 이상한 날씨라도 꽃은 피니, 금세 양파 햇것들이 시장에 풀릴 것이다. 몇 주일 동안 양파 안 먹으면 그만이다. 울상인 것은 주부들이 아니라 중국 음식점들인 것이다. 이런 것을 가지고, 2년 전엔가 봄에 대통령이 각료들을 모아놓고 마늘값을 잡으라고 잡도리를 하시는 걸 보고는, 그 세심함에 감동은 되지만 다소 코믹했다. 해마다 그맘때는 마늘값이 오르고 몇 주 지나 햇마늘이 나오면 금세 값이 안정되는데, 뭐 그걸 가지고 청와대에서까지 난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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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그만큼 일상적으로 먹는 채소에 대해 우리가 제철 감각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다. 양파, 감자, 대파, 쪽파, 풋고추, 애호박, 오이 등은 늘 시장에 나와 있으니 제철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양파와 감자는 저장성이 좋아 사시사철 시장에 넘쳐나지만 역시 제철의 것이 맛있다. 대파와 쪽파, 풋고추, 애호박, 오이, 상추 등은 제철이 아니면 온실에서 키워 나오는 풋것들이니, 반드시 철을 생각해 가면서 사먹어야 하는 채소다. 초봄에 오이소박이를 담근다거나, 한겨울에도 된장찌개에 반드시 애호박과 풋고추를 넣는, 철없는 소비를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사실 양파는 바로 지금부터 5월 초까지가 정말 맛있을 때다. 겨울 동안 저장해 놓은, 빨간 망에 든 주황빛 껍질의 양파를 말하는 게 아니다. 요즘 재래시장이나 동네 채소가게에 가면, 다발로 묶어 파는 양파가 있다. 위에 붙은 푸른 잎을 그대로 둔 채 큰 단으로 묶은 것도 있고, 푸른 잎을 자르고 너덧 개씩 단정하게 묶어 놓은 것도 있다. 밭에서 갓 뽑아 올려 겉껍질이 주황빛으로 마르기 이전의 하얀 양파, 물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싱싱한 양파인 것이다.

대개 초보 주부들은 이런 양파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아니 양파라는 생각도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딱 한철만 만날 수 있는 양파야말로 진짜 맛있는 양파다. 이것을 사다가 썰어서, 그냥 쌈장에 찍어 먹어 보라. 전혀 맵지 않고 씹을 때마다 아작한 단물과 양파 향이 솟아난다. 춘장에 찍어 먹는 중국집의 양파는 매운맛을 줄이느라 물에 담가 놓은 것이어서 양파의 향과 맛도 함께 줄어들어 있다. 그러니 이런 햇양파 맛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익혀 먹기 아까울 정도로 맛있는 햇양파는 채를 썰거나 동글하게 썰어 채소 샐러드에 넣고 샌드위치에도 넣으면 아주 맛있다.

쪽파도 지금이 제철이다. 쪽파는 일 년에 딱 두 번 맛있다. 겨울이 풀리자마자 심어 봄에 나오는 것, 그리고 초가을에 심어 김장철에 나오는 것, 이렇게 두 번이다. 이렇게 봄에 쪽파가 나온 뒤, 6월 말께가 되면 꽃대가 올라와 쪽파는 찾아볼 수 없다. 이때는 유일하게 실파(대파가 되기 전의 어린 파)가 쪽파를 대신할 수밖에 없다.제철 채소의 좋은 점은 별로 조리를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맛있다는 것이다. 쪽파를 그대로 데쳐 초고추장을 찍어 먹으면 달착지근하고 맛있다. 오징어 데친 것에 돌돌 말면 금상첨화다.

재료가 맛있으니 파전을 부쳐도 맛있다. 쪽파를 길쭉하게 썰어서 걸쭉한 파전 반죽에 섞어 부치는 것이 가장 쉬우나, 이것은 밀가루 맛으로 먹는 싸구려 파전이다. 제대로 파전을 부치려면 썰지 않은 긴 쪽파를 기름 둘러 달군 팬에 펼쳐놓고, 그 위에 밀가루와 달걀, 물 등을 섞은 걸쭉한 반죽을 훌훌 뿌린다. 더 맛있게 하려면, 여기에 굴과 오징어, 고기 양념한 것 등을 조금씩 얹어 함께 부친다. 깨끗하고 말끔하게 부쳐지지는 않지만, 이렇게 하면 밀가루보다는 파 맛으로 먹는 진짜 동래파전 스타일의 파전이 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쪽파가 제철일 때는 파김치를 한번 해볼 일이다. 김장철에 갓김치 안에 넣어두어 겨우내 맛있게 먹었던 쪽파가 이젠 다 떨어져 약간 아쉬운 감이 있을 때이니, 이때쯤 다시 한번 파김치를 담그면 여름까지 먹을 수 있다. 파김치는 다른 김치와 달리 손이 거의 가지 않는 쉬운 김치다. 보통 김치를 한번 하려고 하면 배추와 무 같은 기본 재료는 물론 파와 마늘, 생강, 젓갈, 고춧가루를 준비하고, 여름 김치일 경우에는 찹쌀 풀까지 쑤어야 하니, 재료 준비가 일의 절반이 넘는다.

하지만 파김치는 아주 간단하다. 깨끗이 다듬어 씻어 놓은 쪽파에, 멸치액젓과 고춧가루만 있으면 된다. 약간 소금에 절였다가 버무리는 사람도 있는데, ‘귀차니스트’인 나는 그냥 절이지 않은 쪽파에 멸치액젓과 고춧가루를 넣고 버무린다. 몇 번 손으로 뒤적이면 뻣뻣하던 쪽파는 어느새 숨이 죽어서 잘 버무려진다. 파와 마늘 같은 양념은 필요 없다. 파김치에 다시 파를 넣을 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마늘도 안 넣는 것이 깨끗하다. 오로지 액젓에 절인 파, 그 자체의 맛으로 먹는 김치다.

짭짤한 파김치는 하루 이틀이면 숨이 죽고 간이 맛있게 밴다. 그때 먹기 시작하는데, 신 김치를 좋아하는 나는 파김치도 익은 것을 좋아한다. 냉장고에 넣지 않고 며칠 익히면 김치 익은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다시 하루쯤 냉장고에서 숙성시켜 먹는데, 이때부터 파김치는 정말 밥도둑이다.


대중예술평론가. 요리 에세이 『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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