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피치] 진정한 '철인'기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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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1939년 5월 1일.

뉴욕 양키스 팬들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지난 15년 동안 침대 머리맡의 자명종 시계처럼 매일 만났던 낯익은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25년부터 양키스의 주전 1루수로 단 한 경기도 거르지 않고 출전했던 '철인' 루 게릭의 이름이 라인업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전설의 철인을 제치고 양키스 1루수로 출전했던 베이브 댈그린은 양키스가 22 - 2로 크게 앞서자 전날까지 2천1백30경기 연속 출장이란 대기록을 세운 게릭에게 기록 연장을 위해 교체 출전할 것을 제안했다. 게릭은 단호하게 말했다.

"거기에 내가 설 자리는 없어. "

당시 게릭은 희귀한 '루 게릭병' 을 앓고 있었다. 뇌에서 전달하는 명령을 몸이 소화시키지 못하는 병이었다. 그는 39년 시즌 시작 후 정상적인 플레이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여덟번째 경기를 끝낸 뒤 스스로 기록 경신을 중단하기로 결심했다.

98년 9월 21일.

마크 맥과이어(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새미 소사(시카고 컵스)가 열띤 홈런 경쟁을 벌이며 지구촌을 뒤흔들고 있을 때 또 한명의 '철인' 칼 립켄 주니어(볼티모어 오리올스)가 "이젠 때가 된 것 같다" 며 연속경기 출장 기록을 중단했다.

립켄은 양키스와의 홈경기를 앞두고 당시 레이 밀러 감독을 찾아가 선발 라인업에서 빼줄 것을 요청, 무려 17년 동안이나 등에 지고 있던 짐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2천6백32경기 연속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포기한 것이다. 립켄은 82년 5월 30일부터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선발로 경기에 나서 몸을 사리거나 편법으로 기록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깨지 못할 거라던 게릭의 대기록을 깼다. 립켄은 그러고 나서 기록 연장을 위해 팀 전력이 약해지거나 다른 선수가 출장 기회를 잃어버려서는 안된다고 판단, 스스로 물러났다. 용기있는 결단에 팬들이 그에게 보내는 존경심은 훨씬 더 커졌다.

2001년 10월 2일. '한국의 철인' 최태원(SK)이 9백 경기 연속 출장을 돌파하게 된다. 대단한 기록이다. 그는 95년 4월 16일 쌍방울 레이더스 유니폼을 입고 기록을 시작했고 SK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뒤에도 단 한 경기도 거르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수비 도중 부상 위험이 큰 2루수다.

최태원의 대기록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는 올해 기록 연장을 위해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타석에 들어서지도 않고 1이닝 수비만으로 기록을 이어간 적도 있고 대타로 나와 번트 한번 대고 물러난 적도 있다.

그의 대기록이 기록 연장을 위한 출전으로 만들어진다면 훗날 '부끄러운 기록' 으로 기억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그가 지금 기록을 중단한다고 해도 아무도 그가 '철인' 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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