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흙길 보행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초등학생인 아이가 잠깐 동안 외갓집으로 지내러 간 후 나는 린다 호건의 책을 들춰보았다. 아내는 아이와 함께 올레를 걷겠노라고 했다. 아이와 많은 대화도 하겠다고 했다. 나는 외돌개에서 출발하는 코스를 미리 슬그머니 알려 주었는데 아이의 귀와 눈이 더 밝고 맑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섞어 말했다. 그때 나는 다시 린다 호건의 문장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모든 생명이 본래부터 가진 고유한 언어 세계에 관한 것이었다. 다음의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의 일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밤중에 낮의 가면을 벗은 옥수수 밭에 가면 당신은 식물들이 서로 얘기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바람이 지나갑니다. 거기에는 바람, 독수리, 옥수수, 돌의 목소리들인 언어들이 모두 있습니다.”

아이가 올레를 걷고 돌아온 그날 밤, 나는 아이와 전화 통화를 했다. 내가 물었다. “흙길을 걸으며 무엇을 보았니?” 아이는 주저주저했다. 내가 다시 아이의 대답을 묵묵히 기다리자 아이는 그제야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듯 낮에 보고 만진 것을 하나 둘 말하기 시작했다. “바다, 섬, 흙탕길, 꽃, 풀밭, 언덕, 폭포, 공기, 하늘, 구름떼, 새, 바람, 이끼….” 아이는 그것들과 약간 친해진 기분이라고 했다. 나는 아주 좋은 여행이 되었겠다고 칭찬을 보탰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아스팔트 위를 오가는 나로서는 틈나는 대로 흙길을 걸으려 애를 쓴다. 오래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독일 시인 루트비히 펠스의 ‘장치’라는 시가 불편했다. “당신은 새의 울음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틀고 / 나는 플라스틱 꽃에 물을 준다.” 루트비히 펠스의 시구절처럼 될 날이 당장에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생태시인 노베르트 무스바허의 ‘도시에서의 굴착작업’이라는 시를 읽을 때에도 불편함은 있다. 시인은 도시에서 흔한 아스팔트 굴착작업에 대해 노래하는데, 많은 사람은 굴착작업 하는 곳을 지나가면서 보행에 지장을 느껴 화를 내기도 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화를 낸다. / 그러나 내심 즐거워하고 있으니 / 아스팔트 / 아래에 / 흙이 있을 줄이야!” 그나마 사람들의 마음이 이 시에서처럼 보송보송한 흙을 기억하고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럽겠는가.

요즘 아파트 한 귀퉁이에는 라일락꽃이 보랏빛으로 피고 있다. 숲은 한창 신록이다. 생명은 각각의 목소리인 언어로 말을 걸어온다. 이러할 때 우리는 흙길 위에서 이렇게 감격해보자. “흙이 있을 줄이야!” 감격, 그래, 감격한 지 오래되었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