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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츠는 내친구] 범선모형 동호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8면

그들은 항상 대양(大洋)을 꿈꾼다. 좁은 방구석에서 칼.줄.톱.드릴.사포 등으로 나무를 깎고 다듬으며 인고(忍苦)의 바다를 건넌다. 체중이 주는 몇달 동안의 씨름 끝에 한 척의 범선을 만들고는 이내 새로운 항해를 떠난다.

서울 목동의 한 미술학원(02-2646-1809)에서 '한국 범선모형 동호회' (회장 咸成沃.42.은행원.서울 반포동)사람들을 만났다. 미술학원은 회원 손영수(孫榮洙.44.화가.경기도 일산)씨가 운영하는 곳이다. 회원은 40여명.

그들은 빅토리.산타마리아.엔데버 호(號)등 17~19세기 오대양을 누볐던 범선의 '선장' 들이다.

"범선 모형을 만드는 게 그렇게 매력이 있습니까. " 그들은 미소를 머금고는 이내 '자랑' 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한의사 반상훈(潘相勳.35.서울 오륜동)씨는 환자들이 없을 때 틈틈이 병원에서 배를 만든다. 환자 보랴 배 만드랴 손이 달리던 그는 취미활동을 제대로 하기 위해 다른 한의사를 고용할 정도로 골수가 됐다.

"한약재를 달인 물로 돛을 물들이면 오랜 세월 바닷바람과 풍랑에 바랜 돛의 색깔이 살아난다" 며 자랑이 대단하다.

항해사 출신으로 지금은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최광효(崔光孝.55.인천시 마장동)씨. "어느 해인가 새벽녘까지 집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가 납디다. 아내가 화장실에 가는 소린 줄 알았는데 아침에 보니 도둑이 왔다 갔더라고요. "

회원들은 "이 일에 재미를 붙인 뒤론 친구들이 '술 한잔 하자' 고 연락해도 배 만드는 시간을 뺏기기 때문에 그리 반갑지 않다" 고 입을 모은다.

범선 모형을 아이들 '장난감' 정도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크기는 길이 1m 남짓. 조립품의 경우 설계도면만 10여장이 되고 못이 5백~1천개가 들어간다.

재료는 너도밤나무 또는 호도나무. 키트(조립 세트) 부품이라도 직접 톱으로 자르고 대패로 다듬고 못을 박기도 한다. 키트 값은 10만원에서 1백만원.

숙련자용 키트의 경우 작업시간이 6백시간. 하루 두 시간씩 작업해도 1년 가까이 걸리는 셈이다. 초보자용이라도 보통 3~4개월은 공을 들여야 한다. 범선을 작게 만드는 것일 뿐 작업과정은 실제 배를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들이 동호회를 결성한 것은 지난해 7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던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한자리에 모였다. 지난달에는 회원들이 그동안 제작한 범선 모형 35점을 모아 서울 대학로에서 '제1회 범선 모형 전시회' 를 열기도 했다.

동호회 회원들은 대부분 유럽에서 수입한 범선 모형 키트를 이용한다.

그러나 김남수(金南秀.36.부산시 광한동.051-753-0130)(http://sailingship.com.ne.kr)씨는 직접 설계도를 그리고 목재를 구해 자작(自作)을 하는 골수 매니어다.

金씨는 조선소에서 일을 하다 지난해부터 범선 모형 주문제작을 전업으로 삼게 됐다.

외국 배를 만드는 데 불만을 품고 전통 한선(韓船)모형 제작업체를 만든 사람도 있다. 대우조선에서 함께 근무했던 박영종씨와 이종윤(李鍾允.46.서울 신대방동)씨는 지난해 '영 공방(http://www.youngmodeler.com)(055-681-5955)' 을 설립한 뒤 거북선.조선통신사선 모형을 만들 수 있는 키트를 판매하고 있다.

◇ 범선 모형 따라잡기=국내에는 아직 범선 모형 제작업체가 없다. 대형 완구점에서 간혹 수입 키트를 한두점씩 팔기는 하나 사실상 국내에서는 구입하기 어려운 형편.

회원 손영수씨가 지인들을 통해 외국에서 들여온 범선 모형 키트를 초보자들에게 공급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미술학원에서 초보자들을 대상으로 강습도 할 계획이다.

범선 모형의 작업과정 전반은 회원 이동식(李棟埴.33.의사.대구시 수성구 범어동)씨가 자신의 홈페이지(http://users.unitel.co.kr/~dslee9)에서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성시윤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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